컨텐츠 바로가기

06.17 (월)

코로나, 햄버거… 다시 인종차별을 생각하다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아무튼, 주말- 이용재의 필름위의만찬]

22. '해롤드와 쿠마'와 음식 여정

조선일보

미국에 사는 두 소수민족 친구인 해롤드와 쿠마는 프랜차이즈 패스트푸드점 '화이트 캐슬'에서 파는 슬라이더(작은 햄버거)를 먹으려고 찾아가는 길에 봉변과 인종차별, 황당한 사건을 겪는다. / 뉴 라인 시네마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제목 짓기란 어려운 일이다. 쓰든 옮기든 글은 밥벌이 수단이니 잘 안다. 내용이며 주제를 드러내면서도 너무 길면 안 된다. 내 책 '외식의 품격'의 원래 제목은 '남자의 사랑과 성공은 식탁에서 이루어진다'였다. 너무 길고 어색하다고? 맞는다. 그래서 편집자가 애를 많이 써 제목을 바꾸었다. 영화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믿으니, 원제가 좀 아니다 싶어도 적절히 이해하며 넘어간다. '해롤드와 쿠마'(2004)가 좋은 예이다. 대체 해롤드와 쿠마는 누구이며, 이들이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 영화인가? 제목으로는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는다.

한국계 존 조(해롤드)의 친숙한 얼굴이 포스터에 담겨 있으니 안심은 되지만 그래도 의문은 가시지 않는다. 대체 '해롤드와 쿠마'는 무슨 영화인가? 이 영화의 원제가 '해롤드와 쿠마 화이트 캐슬에 가다(Harold and Kumar Go to White Castle)'임을 알면 적어도 숨통은 트인다. 두 사람이 어딘가를 가는 이야기군. 그러나 '화이트 캐슬'이 걸린다. 무슨 장소일까? 백기사가 성주인 언덕 위의 흰 성인 걸까? 우리는 화이트 캐슬이 무엇인지 잘 모른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마음이 좀 누그러진다. 수입사에서도 고민이 컸겠군. 역시 제목 붙이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해롤드와 쿠마는 각각 한국계와 인도계 미국인이다. '베프(베스트 프렌드)'이자 룸메이트인 둘은 소수민족 미국인이 그렇듯 이민자 부모의 기대를 한껏 짊어지고 살지만, 그 기대에 대한 대처는 더 이상 극과 극일 수 없다. 둘 다 공부를 잘했지만 해롤드는 모범생 코스를 밟아 정장에 넥타이 차림의 금융업계 종사자가 된 반면, 쿠마는 가업인 의술에 몸담으라는 아버지와 형의 마수를 최대한 피해 대마초를 피우며 늘어져 산다. 어느 주말, 대마에 나른하게 취한 쿠마가 텔레비전에서 '화이트 캐슬' 광고를 보고 갑자기 꽂혀, 해롤드를 꼬셔 밤길을 나선다. 그렇게 두 사람의 파란만장한 모험이 펼쳐진다.

조선일보

그래서 화이트 캐슬은 뭐 하는 곳인가. 작은 햄버거인 '슬라이더(slider)'를 파는 프랜차이즈 패스트푸드점이다. 말하자면 맥도널드나 버거킹 같은 곳인데 입지는 좀 다르다. 두 프랜차이즈가 세계 규모라면 화이트 캐슬은 미국 내에서도 동부와 중부를 중심으로 열 몇 군데만 운영한다. 미국은 워낙 땅덩어리가 넓어 이렇게 지역 규모로 영업하는 프랜차이즈도 꽤 많다. 같은 슬라이더만 해도 내가 살았던 애틀랜타에는 남부만의 프랜차이즈 '크리스털(Krystal)'이 대세였다. 국내에서도 가끔 팝업 스토어를 여는 '인 앤 아웃 버거(In-N-Out Burger)'도 대표적 지역 프랜차이즈이다. 기본에 충실한, 깔끔한 햄버거로 컬트에 가까운 인기를 누리지만 캘리포니아주가 본거지이며 텍사스주 넘어 동쪽으로 사업을 확장하지 않았다.

슬라이더는 일반 햄버거와 어떻게 다른가? 해롤드와 쿠마가 늦은 토요일 밤거리를 헤매게 만든 화이트 캐슬은 자신들만의 비법을 내세운다. 번철에 곱게 썬 양파를 한 켜 올려 익히는 가운데 패티(고기)와 모닝롤만 한 번(빵)의 반쪽을 차례대로 위에 올린다. 패티에는 다섯 군데에 구멍이 나 있어, 양파가 익으면서 나오는 열과 수증기로 패티와 번을 익히는 가운데 특유의 맛도 불어넣는다는 게 그들의 주장이다. 얹어 익히는 것만으로도 양파의 맛과 향이 빵과 패티에 고루 밴다는 이야기이니 액면 그대로 믿기는 어렵다. 다만 번철에서 수분을 날린 양파는 당이 열과 반응해 캐러멜화를 일으켜 단맛이 확 살아나니, 이를 쇠고기 패티, 치즈 등과 함께 빵 사이에 끼우면 맛이 없을 수 없는 음식이 되기는 한다.

슬라이더의 크기도 나름의 장점이다. 10여 년 전 수제 버거 열풍이 불면서 입에 넣지도 못할 정도의 거대한 햄버거가 득세하는 한편 슬라이더도 지분을 조금씩 넓혀 나갔다. 작아서 손으로 간편히 먹을 수 있는 '핑거 푸드'로 각광받았고, 한 번에 여러 개를 먹을 수 있어 다양한 맛을 즐기기 원하는 사람들에게 인기를 끌었다. 실제로 다른 맛의 슬라이더 세 개를 묶어 맛보기 코스 같은 것을 내놓는 등, 주요리가 나오기 전 전채로 활용하는 경향이 한 차례 파인다이닝(고급 식당)의 세계를 스치고 지나가기도 했다.

어쨌든 화이트 캐슬의 슬라이더를 찾아 밤길을 나섰다가 두 사람은 숱한 봉변에 휘말린다. 근처 프린스턴대학의 대마초 파티에 휘말리는가 하면 편의점에서 시비나 거는 양아치들에게 괴롭힘도 당한다. 도로에서 1990년대에 인기를 얻었던 '천재 소년 두기'의 닐 패트릭 해리스를 태워줬다가 차를 도둑맞고 유치장에도 갇힌다. 심지어 동물원을 탈출한 치타와 대마초를 나눠 피우고는 등에 올라타고 숲속을 쏜살같이 달리는 경험까지 맛본다.

과연 화이트 캐슬 슬라이더를 그렇게까지 고난을 겪으며 찾아가 먹어야 할까? 그래 봐야 프랜차이즈이니 엄밀히 따지자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약을 빤 듯' 우스꽝스러운 두 사람의 여정에는 사실 뼈가 숨어 있다. 바로 백인 위주 국가에서 벌어지는 소수민족의 정형화 및 차별을 향한 풍자이다. 해롤드는 회사에서 백인들에게 불링(bullying·집단 괴롭힘)을 당하는 한편 그들의 일마저 억지로 떠맡는다. 한편 쿠마는 영화의 성공에 힘입어 제작된 2편에서 피부색 등 외양 탓에 테러리스트로 오해받아 악명 높은 관타나모 수용소로 끌려간다. 실제로 쿠마 역의 칼 펜(Kal Penn)은 이름만으로 인도계로 구분당하기 싫어서 현재의 예명을 만들었다.

웃긴 영화에서 벌어지는 차별이라 언제 봐도 제법 쓰게 다가오는 가운데, 코로나 바이러스의 요즘에는 씁쓸함이 몇 겹 더 붙었다. 먼저 확진자가 늘었다는 이유로 미국 등지에서 무차별적으로 동양인에게 가해진 폭언 및 폭력 탓이다. 유럽과 미국에서 확진자가 대폭 늘고 있는데, 과연 그 지역 백인도 한국에서 폭언과 폭력에 시달릴 가능성이 있을까? 아니라고 해도 안심은 이르다. 우리도 실은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흑인이나 동남아인을 차별하고 있기 때문이다. 모두에게 어려운 시기라 생존에 얽힌 많은 과제가 쌓여 있지만 그래도 고민해봐야 할 사안이다.

[이용재 음식평론가]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