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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0 (월)

[편집자 레터] 본디 존재였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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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이한수 Books팀장


본디 존재였던 것이 제 이름을 내주고 밀려나는 도중에 있는 걸까요. 밥이란 본디 집에서 먹는 것이고 밖에서 먹는 밥은 외식이나 걸식이었는데 이젠 집에서 먹는 밥이 오히려 특수한 ‘집밥’이 되었지요. 책이란 본디 파피루스 시절부터 종이였는데 전자책 나오자 종이책이란 말이 생겼습니다. 온라인 나오고서 우리 사는 곳이 오프라인 되었고, 인터넷신문 생기자 종이신문이 되었습니다. 가상현실이나 증강 현실이란 형용 모순도 이젠 어색하지 않네요.

이런 흐름이 공존으로 갈지, 지배와 종속으로 갈지 모르겠네요. 악화(惡貨)가 양화(良貨)를 쫓아낸다는 경제법칙이 적용될는지, 마크 트웨인 소설 '왕자와 거지'처럼 서로의 자리를 이해하는 해피엔딩으로 귀결될는지 알 수 없습니다. 어느 날 깨어보니 벌레가 된 그레고리 잠자(카프카 '변신')처럼 한때 쓸모 있었으나 한순간에 무용한 존재가 될 수도 있겠고요.

소설가 한강은 "사람들은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에 배고파 있다. 유튜브 다음은 다시 종이책일 것"이라고 말한 적 있습니다. 바람을 투영한 말이겠으나 "진정한 증강 현실은 책 속에 있다. 앞으로 새롭게 출현할 것은 잠시 사라지고 있다고 믿었던 종이책"이란 주장에 동의하렵니다. 형식이 내용을 규정한다는데, 내용이 압도적이면 형식이야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내용을 못 채울까 걱정일 뿐이지요.

장자는 말했습니다. 중앙의 임금인 ‘혼돈’에게 좋은 삶을 살도록 눈·코·입 등을 만들어주는데 구멍을 다 뚫자 결국 죽고 말았다고요. 본디 존재였던 것의 본질마저 다치면 생명은 끝난다는 경고입니다.

[이한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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