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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7 (금)

70년대 해외 출장길, 현장직원 위해 챙겨간 선물… 조선일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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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조선일보] [18] 이준용

조선일보

이준용 대림산업 명예회장이 지난 2015년 8월, 서울 중구 조선일보 본사를 찾아 ‘통일과 나눔’ 재단에 자신의 전 재산(2000억원 추정)을 기부하겠다는 뜻을 밝히고 있다. /주완종 기자


오늘도 그랬다. 대문 앞에 놓인 조선일보를 챙겨들고는 거실로 돌아와 읽는 것, 매일 아침의 시작이다.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챙겨 보았더니 이젠 인이 박인 모양이다. 아침마다 오랜 친구를 맞이하듯 나는 오늘도 조선일보를 만난다.

돌아보면 1960~1970년대는 모험의 시대였다. 외화를 벌고,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미국, 일본은 물론이고 동남아시아부터 중동, 아프리카까지 겁 없이 뛰어다녔다. 두 주먹 불끈 쥐고 너도나도 세계를 상대로 경쟁에 나섰다.

하지만 그땐 모든 것이 부족했다. 무엇보다, 정보가 없었다. 나뿐 아니라 모든 기업인이 정보에 목말랐다. 새로운 시장에 대한 단 한 줌의 정보라도 얻기 위해 매일 조선일보 지면을 빈틈없이 읽고 또 읽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때 나는 수시로 해외 출장을 다녔다. 조선일보는 언제나 출장길의 동반자였다. 나는 서류 가방과 함께 신문을 꼭 챙겼다. 기내에서 다 읽은 후에도 버리지 않고 현장으로 가지고 갔다. 당시만 해도 해외 현장 직원들이 국내 소식을 접할 수 있는 수단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신문을 나눠 읽으며 어린아이처럼 좋아하던 현장 직원들의 모습이 40년이나 훌쩍 지난 지금도, 불쑥 어제 일처럼 떠오른다. 조국에 대한 향수를 잠시 가슴에 묻어두고 오로지 성실함으로 대한민국의 저력을 증명해 보인 그 영광의 순간을 잊을 수 없다.

이젠 언제 어디서나 신문을 마음껏 볼 수 있다. 해외에서도 마찬가지다. 쉽고 편하게 볼 수 있지만 여전히 가슴을 뛰게 하는 기사는 눈을 붙잡게 마련이다. 예전에는 경제, 정치, 국제 이슈를 주의 깊게 살폈다면, 이제는 갑남을녀의 고난한 삶에 대한 이야기에 눈길이 더 오래 머무른다. 우리 사회를 위해서 조금이나마 도움을 줄 수 있는 나와 우리의 역할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내 오래된 벗 덕분이다. 고맙다.

[이준용 대림산업 명예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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