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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2 (수)

장군은 정치가가 아니다...파란만장했던 '전쟁의 신' 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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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희경 성균관대 초빙교수]
글 잘 쓰는 사람 많고 시 잘 짓는 사람도 많지만 문장의 신선(文仙), 시의 신선(詩仙)이라는 칭호를 얻은 사람은 사마천과 이백이다. 그렇다면 용병술의 신선(兵仙)이라는 칭호를 얻은 사람은? 바로 회음후 한신이다. 소하 장량과 함께 한초삼걸로 뽑히는 명장이다. 얼핏 용병술과 신선이라는 말이 서로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드는데, 그냥 전쟁의 신이라고 보면 좋다. 전쟁이나 병법에 관심이 있다면, 혹은 정치에 관심이 있다면(왜냐하면 전쟁은 정치라는 전체의 일부분이기에) 한신의 삶은 주목해볼 가치가 있다.

소하와 한신

한신의 일생은 그야말로 파란만장 그 자체다. 평민에서 출발해 대장군에 올랐고, 전쟁에서 세운 공으로 왕(한나라 초기에 왕에 봉해진 여덟 왕 중의 하나인 초나라 왕)의 지위에까지 올랐다. 그러나 다시 열후로 떨어졌고, 급기야 모반의 죄로 삼족이 멸해지는 불행한 최후를 마쳤다.

평민이었을 때는 가난했다. 특별히 선행을 베푼 일도 없었기에 추천을 받아 말단 관리가 될 수도 없었다. 장사를 하려 해도 밑천이 없었다. 그러니 마땅한 호구지책이 없어 이곳저곳에서 눈칫밥을 얻어먹는 세월을 보내기도 하였다. 한 때 고향 동네 불량배의 가랑이를 통과하는 굴욕을 겪었던 흑 역사는 너무도 유명하다. 이 소문은 나중에 전쟁을 하는 와중에 크게 도움이 된다. 상대가 한신은 겁쟁이라는 선입견을 가져 방심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한신은 진나라에 반기를 든 초나라 군대가 고향 마을을 지날 때 항량·항우의 편에 가담하는 것으로 풍운의 삶을 시작했다. 그러나 자신의 계책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유방 쪽으로 노선을 변경한다. 유방의 휘하에서 처음엔 곡식 창고를 관리하는 연오라는 낮은 관리가 되었는데, 죄에 연루되어 목이 베이는 형벌로 일생을 마감할 뻔했다.

자기가 목이 잘리는 차례가 되었을 때 한신은 “주상께서는 천하를 차지하려고 하지 않느냐? 어찌 장사를 죽이려 하느냐?”고 일갈한다. 그의 범상치 않은 태도를 보고 인재임을 알아본 하후영 덕분에 목숨을 건졌다. 그 뿐만이 아니라 그의 추천으로 치속도위(식량을 관리하는 군관)가 된다. 그 자리에서 일생일대의 또 다른 은인 소하를 만난다. ‘백락’ 소하의 안목 덕분에 한신은 일약 대장군에 오른다(나중엔 또 그 때문에 죽게 된다. “성공한 것도 소하 때문이었고, 패한 것도 소하 때문이었다”는 말은 그래서 생겼다.).

한중대(漢中對)

애초의 약속에 따르면 먼저 관중에 들어간 유방이 관중의 왕이 되어야 했다. 항우가 약속을 어기고 진나라에서 항복한 세 장수를 삼진의 왕에 봉하고, 유방은 파와 촉, 그리고 한중을 관할하는 한왕에 임명해 버렸다. 유방을 견제한 것이다. 유방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받아들이기 어려웠지만 세력이 약해 어쩔 수 없이 한중에 들어가게 된다.

소하의 추천으로 한신은 대장군에 오른다. 한중에서 대장군 임명식을 마치고 나서 한왕 유방은 한신에게 어떤 계책으로 과인을 가르치겠느냐는 질문을 던진다. 여기에 한신이 대답한 것이 유명한 ‘한중대’(漢中對)다. 삼고초려한 유비의 물음에 제갈량이 천하삼분의 계책으로 대답한 융중대(隆中對)와 함께 쌍벽을 이루는 유명한 군신 간의 문답이다.

당시 항우는 병력이나 명망의 측면에서 유방보다 훨씬 강했다. 그러므로 현상적으로 보면 유방이 강력한 항우를 이길 수 없을 것 같았다. 이러한 때에 한신은 전쟁의 승부는 군사적 능력뿐만이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인심의 향배에 따라 결정된다는 각도에서 항우의 인간됨과 개성, 그가 취한 조치를 냉철히 분석한다.

항우는 기세가 대단하지만 현명한 장수를 믿고 일을 맡기지 못하고, 마음씨는 좋지만 인색해서 공을 세운 자에게 작위를 잘 주지 못하는 등의 문제가 있었다. 따라서 그와 반대로 하면 목전의 항우의 우세는 실상 쉽게 약화시킬 수 있다고 한신은 설파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관중을 평정해서 이를 근거지로 삼아 동쪽으로 향하면 천하를 차지할 수 있음을 피력한다. 한마디로 말해서 항우의 세력이 막강해보이지만 민심을 잃었기 때문에 머지않아 붕괴하리라는 것. 목하 세계의 정세도 비슷한 것 같다. 말로 위축된 유방에게 전략적 자신감을 불러일으켰으니 그가 기뻐한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한왕은 한신의 대책에 따라 우선 삼진을 평정한다.

한신의 전공(戰功)

한신은 ‘프레젠테이션’만을 그럴 듯하게 잘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용병술에서 뛰어났다. 크게 네 차례 전투에서 자신의 군사적 재능을 드러냈는데, 위나라, 조나라, 제나라와의 전투, 마지막으로 항우를 멸한 해하의 전투가 그것이다.

먼저 위나라와의 전투다. 전국시대 위나라 왕족의 후예 위표가 당시 위나라 왕이었다. 위표는 지금의 산서성 서남방 포관에 방어 진지를 구축해 임진으로 통하는 황하의 나루터를 봉쇄했다. 한신은 임진에서 황하를 건너는 시늉을 하고서는, 실제로는 하양에서 나무통을 타고 황하를 건너 위나라를 평정한다. 성동격서다.

조나라를 격파한 정형 전투는 특히 유명하다. 오합지졸의 3만 군사로 배수진을 쳐서 성안군 진여의 군사 20만을 격파해버렸으니 어찌 유명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사지에 빠뜨린 뒤라야 살 수 있고, 망할 곳에 배치한 뒤에야 존재할 수 있다”는 병법을 이용해 스스로 각자도생하게 만들어 승리했다.

세 번째 제나라는 쉽게 격파했으나 제나라가 초나라에 구원을 요청하는 바람에 한신은 유수를 사이에 두고 연합군과 대치했다. 한신은 상류에 모래주머니를 쌓아 물길을 막게 하고 유수를 건너가 초나라 장수 용저의 군대와 접전을 벌이다가 거짓으로 후퇴한다. 용저의 군대가 신이 나서 추격하자 한신은 모래주머니를 터뜨려 방류하게 해서 상대를 대파하고 마침내 제나라를 평정한다.

마지막으로 사면초가로 유명한 해하에서의 전투에서 한신이 통솔하던 30만 주력 부대가 항우를 대파하고 항우는 자결한다. 이로써 4년 반을 끈 초한전쟁은 막을 내린다. 2개월 뒤 유방은 황제에 등극한다.

한신의 모반?

사마천은 이런 한신의 혁혁한 용병술을 서술할 뿐만이 아니라 상당한 분량을 할애해서 무섭과 괴통이 한신을 설득하는 대목을 서술한다. 자신의 맹장인 용저가 패하자 항우는 무섭을 한신에게 보내 자기편에 설 것을 설득한다. 그러나 한신은 “자기 옷을 벗어 입혀주고, 자기가 먹을 것을 먹여준” 유방을 배신하지 않았다. 이후 한신이 북방을 평정하자, 제갈량이 유비에게 그랬던 것처럼 제나라에서 만난 모사 괴통도 한신에게 천하삼분의 계책을 올리면서 결단을 촉구했다.

“안다는 것은 결단하는 것이고, 의심은 일에 방해가 됩니다. 터럭같이 작은 계획을 자세히 따지고 있으면 천하의 대사를 날려 보내고, 그렇게 해야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과감히 행동하지 않는 것은 모든 일의 화근이 됩니다.”
이번에도 한신은 망설이면서 한나라를 차마 배신하지 않았다. 그들이 설득한 것처럼 초한전쟁의 와중에 만약 한신이 초나라의 편에 서거나 딴 살림을 차렸다면 또 다른 ‘삼국지’가 탄생했을지도 모른다.

황제에 등극한 유방에게 “군주를 떨게 할 만한 위세를 지녔고, 상을 받을 수 없을 만큼 큰 공로를 이룬” 한신은 매우 위험한 존재였다. 유방은 한신을 초나라 왕에 봉했지만 그가 모반할까 늘 두려워했다. 결국 유방은 거짓으로 운몽에 순행을 가서 전격적으로 한신을 체포한다. 그 자리에서 죽일 수도 있었지만 회음후로 강등하고 장안에 유폐한다. 앙앙불락의 세월을 보내던 한신은 나중에 옛 부하 진희의 모반에 연루되어 여후에 의해 죽임을 당했을 뿐만이 아니라, 삼족이 멸해졌다.

정치가와 대장군

한신이 과연 모반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이 점을 다루는 사마천 서술도 모순된다. 전쟁의 와중에 배신을 권한 무섭과 괴통의 설득에 응하지 않던 한신이 천하가 안정된 이후에 모반했다는 건 쉽사리 납득되지 않는다. 사마천이 배신을 하지 않은 한신에 대해 길게 서술한 것은 삼족이 멸한 그의 운명에 동정을 표하는 것 같다. 다른 한편 마지막 논찬에서는 “천하가 이미 안정된 뒤에 반역을 꾀했으니 온 집안이 멸망한 것도 당연하지 않은가!”라고 준엄하게 비판한다.

사실 한신의 잘못이 크다. 한신은 생전 여러 장군의 능력을 품평하면서 한고조는 10만 명 정도를 이끌 수 있지만 자신은 다다익선이라고 그의 면전에서 발언했다. 번쾌의 집을 방문했다가 나서면서 “살아생전에 번쾌 따위와 같은 반열에 들다니...”하는 오만한 발언을 하기도 했다. 이를 보면 한신은 화를 자초했다.

마오쩌둥은 “항우는 정치가가 아니고 유방이야말로 고단수 정치가다”라고 평한 적이 있는데, 고단수 정치가인 유방 앞에서 한신은 대장군에 불과했다. 맥아더는 전쟁에서 세운 공을 믿고 대통령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오만하게 굴다가 트루먼에 의해 경질된 정도로 끝났지만 한신은 안타깝게도 삼족이 멸했다. 사마천의 평대로 한신은 (도광양회의) 도를 배워 더욱 겸손했어야 했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배우지 못했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또한 용병술이 아무리 뛰어나도, 용병은 전체로서 정치의 부분에 불과한 것이다.

[황희경 성균관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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