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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2 (수)

안익태 애국가 곡조의 불가리아 민요 표절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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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택 문화운동가, 창작 판소리 명창]
애국가 작곡자 안익태는 친일파이자 친나치주의자였다. 게다가 그의 애국가는 불가리아 민요를 표절한 것이라는 주장이 이미 오래전부터 제기돼 왔다. 문화운동가이자 창작판소리 명창인 임진택 씨는 "안익태 애국가는 우리 민족의 수치"라면서 이제부터라도 제대로 된 애국가를 만들기 위한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지난해부터 안익태 곡조 대신 '아리랑'에 애국가 가사를 얹어 부르는 '아리랑 애국가' 운동을 펼치고 있는 그는 '아리랑 애국가'는 임시방편이며 장기적으로는 국민들의 뜻과 지혜를 모아 한국을 진정으로 대표할 수 있는 애국가를 만들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관련 기사 : "친일파 애국가 대신 '아리랑 애국가' 불러야 할 때")

임진택 씨의 '애국가에 무슨 일이 일어났나' 연재를 통해 현재 우리가 부르고 있는 안익태 애국가에는 어떤 문제가 있는지, 제대로 된 애국가를 만들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지 함께 고민해 본다. 다음은 연재 순서.(편집자)

1. 두 개의 감춰진 진실과 한 개의 뒤집힌 사실
2. 애국가, 언제 어떻게 생겨났나?
3. 안익태의 두 얼굴 - 애국가 작곡 : 친일·친나치 행각
4. 김구도 몰랐고 이승만도 속은 안익태의 거짓말
5. 안익태 애국가 곡조의 불가리아 민요 표절설
6. 애국가 작사자 논쟁 – 안창호인가 윤치호인가?
7. '애국가 작사자 조사위원회(1955)' 활동의 전말(顚末)
8. 윤치호 애국가 작사설 물적(物的)증거에 대한 검토
9. 안창호 애국가 작사설 전문(傳聞)증거에 대한 검토
10. 도산 안창호의 애국창가운동과 애국가 시상(詩想)
11. 만신창이가 된 우리의 애국가, 이제 어찌할 것인가?
12. '아리랑 애국가'로 민족정기 되살리자

<애국가> 표절 시비(是非)에 관한 선행 연구들

<애국가>의 작곡자 안익태에게는 변절(變節) 행각과는 성격이 다른 또 하나의 비밀이 존재해 온 바, 바로 <애국가> 곡조의 표절(剽竊)설이다. 그리고 이에 관련한 결정적 증거로 나와 있는 것이 불가리아 민요 '오, 도브루잔스키 크라이'의 악보 및 음곡(音曲)이다. 지금 바로 인터넷을 검색하면 이 불가리아 민요의 시작 부분 합창 연주 선율을 누구라도 확인할 수 있는 바, 먼저 한번 들어보고 나서 이 글을 읽는 것도 괜찮은 방법일 듯싶다.

여기서 독자들에게 먼저 양해를 구해야 할 일이 있다. 이 글의 내용은 내가 발굴해낸 것이 아니다. 전문 연구자들의 선행 연구가 있어 많은 부분을 거기 의존하고 있다. 안익태 애국가 곡조에 표절 논란이 있었다는 사실을 나는 작년(3.1혁명 100주년, 대한민국임시정부 100주년)에 국악작곡가 김정희 교수(한국예술종합학교)가 문제제기함으로써 비로소 알게 되었고, 지난 과정을 살펴보니 이 문제에 관해서는 음악학자이자 음악평론가인 전정임 교수(단국대)가 지은 <안익태>(한국예술종합학교 한국예술연구소 총서, 시공사)라는 책에 상세한 선행 연구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전정임 교수의 책 <안익태>는 구체적인 사료들과 철저한 작품분석을 통해 사실과 진실을 밝혀낸 최초의 안익태 연구서라 할 수 있는 바, 이 글은 그 책 내용 중 '국제음악제에 얽힌 사연들'과 '애국가 표절 시비'라는 항목, 그리고 그 책의 부록으로 실려 있는 두 편의 애국가 표절 시비 관련 논문(제임스 웨이드의 논문 + 공석준의 논문)을 참고해서 쓰고 있음을 먼저 밝혀두고자 한다.

더불어 김정희 교수가 작년 말에 발표한 '안익태 <애국가>, 표절인가 아닌가?'(한국예술종합학교 학회지 '한국예술연구' 제26호, 2019)라는 논문은 내가 쓰려고 하는 논지에 전적으로 부합되는 선행연구임을 함께 밝혀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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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1. <안익태>(전정임 지음, 한예종 한국예술연구소 총서, 시공사). ⓒ시공사




국제음악제(1964)에서 불거진 애국가 표절 시비

이제 1964년 열린 국제음악제 이야기로 들어가 보자. 1960년의 4.19혁명을 짓밟고 5.16 군사쿠데타가 발발한 1961년 말경, 안익태는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박정희를 면담하고 '5.16혁명 돌맞이'를 축하하는 국제적인 대연주회를 개최할 것에 대해 언질을 받았다. 그리하여 1962년 5월 1일부터 16일까지 안익태가 추진위원장을 맡아 총괄한 제1회 국제음악제가 서울에서 열렸다.
세계음악의 불모지인 한국에서 최초로 펼쳐진 이 국제 규모의 음악제는 우선 오케스트라와 합창단의 규모에서, 또 해외 초청 연주자들의 면모에서, 그리고 장르와 양식을 망라한 다양성에서 이전의 음악제와는 비교가 안 될 만큼 수준 차이가 있었다. 거기 개막연주를 비롯한 음악제의 핵심 프로그램에는 안익태가 직접 지휘하는 <애국가>와 <코리아 판타지>가 자리함으로써 그의 명망과 위상은 한층 높아졌다. 그런데 이 행사를 거치면서 음악계 일각에서는 안익태의 연주가 순수한 음악적 가치를 추구하기보다 규모를 과시하기 위한 연주에 불과하다는 혹평이 나오기 시작했고, 또한 국내 음악계를 무시한 독단적인 행동으로 말미암아 음악인들과의 사이에 불신의 골이 깊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1962년의 첫 국제음악제는 군사정권의 홍보 필요에 의해 정부 주도로 이루어졌으나 다음 해 1963년에는 정부가 예산상의 문제를 이유로 국제음악제에서 발을 빼는 바람에 운영에 큰 어려움이 생겼다. 허나 이러한 정부의 일방적인 통보에 오히려 음악인들이 분개하고 나서서 국제음악제의 지속을 응원했고, 안익태가 동분서주(東奔西走)한 결과로 우여곡절(迂餘曲折) 끝에 두 번째 행사를 성사시킬 수 있었다. 허나 이번에도 국내 음악인들 사이에서는 안익태의 독선과 졸속 기획에 연주자들이 희생을 강요당했다는 불만의 목소리가 높았다.

이런 상황에서 1964년, 이번에는 서울시(市)마저 외화 부족을 이유로 후원에서 빠지게 되자 국제음악제는 더 이상 진행될 수 없는 형편에 놓였다. 그럼에도 안익태는 포기하지 않고 고군분투(孤軍奮鬪) 백방(百方)으로 해외 출연자를 섭외하고, 대관과 숙박 등 경비 절감 방안을 모색하면서 전체 일정과 규모를 축소해서 힘들게 제3회 국제음악제의 막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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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2. 1964년 제3회 국제음악제 팸플릿 표지. 출처 : <안익태>(전정임 지음, 시공사 펴냄) p73.



당시 신문 기사에 의하면, 육(陸)·해(海)·공(空) 군악대에 미8군 군악대, 거기에 서울시립교향악단이 함께한 대규모 개막연주 '참전용사들을 위한 진혼곡'에는 그동안 껄끄러웠던 국내 음악인들까지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개막연주는 무사히 치렀으나 악조건 속에서 프로그램 진행상 여러 문제들이 발생할 소지가 없지 않았는데, 행사 둘째 날 이와는 별도로 전혀 예기치 않은 돌발사태가 벌어졌다. 초청받은 미국인 지휘자 피터 니콜로프가 내빈(來賓) 공식 숙소인 반도호텔(지금의 롯데호텔)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자신에 대한 주최 측의 계약 위반에 대해 비난하는 성명(聲明)을 발표한 것이다. 니콜로프가 항의한 내용들은 자신에게 공식 지정호텔이 아닌 하급 호텔을 제공하였다는 불쾌감으로 시작해서, 교향악단 지휘 조건과 스케줄을 임의로 변경한 것, 자기와 사전협의 없이 매니저에게 기부금을 요구한 것 등 주로 자신에 대한 대우(待遇)와 금전에 관한 것이었는데, 그가 열거한 불만 중에는 "자신이 한국에 온 이후 안익태 씨가 한국 음악인들과 접촉을 못 하도록 막았다"는 좀 '엉뚱한' 항의도 있었다. 그 자리에 참석한 추진위원장 안익태는 그러한 항의들에 대해 조목조목 반박했고, 니콜로프가 열거한 불만들은 회견장에 참석한 기자들에게 별 호응을 받지 못하는 분위기였다.

그런데 여기서 정말로 예기치 못한 돌발사태가 벌어졌다. 기자회견 마지막에 니콜로프가 "한국의 <애국가> 중 몇 소절이 나의 모국 불가리아 민요와 유사하다"는 뜻밖의 주장을 한 것이다. 피터 니콜로프는 '불가리아 출신 미국인'이었던 것이다. 니콜로프는 문제의 민요 '오, 도브루잔스키 크라이'를 직접 불러주기까지 하며 이런 말도 했다고 한다. "불가리아 가수들이 한국에 와서 '오, 도브루잔스키 크라이'를 노래했다면 한국 청중은 아마도 일어섰을 것이다."

기자회견장에서 있었던 이 돌발사건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일종의 해프닝으로 받아들여졌다. 아무리 대접을 소홀히 받았다기로, 자기 나라 민요와 좀 비슷하다고 해서 남의 나라 <애국가>를 문제 삼는 것은 무례하기 짝이 없는 언행으로 간주되었을 터이다. 우선 불가리아라는 나라가 우리에게는 너무나 멀고 생소한 나라(당시에는 더구나 공산주의 소련의 위성국가, 적성국가)였으므로 그러한 나라와의 사이에 '유사함' '비슷함'이란 개념은 애초 실감이 날 수 없었을 터이다. 게다가 피터 니콜로프의 갑작스러운 기자회견 배후(背後)에 안익태를 비판하는 국내 음악인들이 관여되어 있음이 은연중에 드러난지라, 대체로 여론은 '선율의 향연에 불협화음' 또는 '국제음악제, 잡음 견디며 폐막' 정도로 안익태의 처지를 동정하는 쪽으로 기울었다.

1964년에 돌발한 이 같은 표절 시비 장면을 돌아보다가 나는 피터 니콜로프의 기자회견 내용 안에 간과(看過)되어온 어떤 중요한 단서가 있음을 발견하였다. 바로 '한국에 온 이후 안익태가 자기를 한국 음악인들과 접촉 못 하게 막았다'는 주장이다. 이 발언은 니콜로프가 항의한 다른 내용들, 계약 위반문제나 대우(待遇) 문제, 금전문제 따위와는 결이 전혀 다른 '엉뚱한' 내용이다. 초청되어 온 해외 유명 지휘자를 굳이 국내 음악인들과 접촉 못하도록 방해해야 할 이유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니콜로프가 '안익태가 자신을 한국 음악인들과 접촉 못 하게 막았다'고 직감(直感)으로 느꼈다면, 그 자체가 놓칠 수 없는 팩트(fact)이다. 안익태가 왜 막았을까? 혹시 미국인으로 초청된 지휘자 피터 니콜로프가 알고 보니 불가리아 출신이라는 사실이 마음에 걸린 것 아닐까? 마찬가지로 니콜로프는 불가리아 태생인 자신으로 인해 한국의 <애국가> 곡조가 불가리아 민요와 유사하다는 사실이 드러날 수 있음을 안익태가 경계하고 있다고 직감한 것 아닐까? 공식 내빈(來賓)인 그의 숙소가 음악제 추진본부인 반도호텔이 아니라 동떨어진 메트로호텔로 변경된 것도 어쩌면 자기를 한국 음악계의 주요 인사들과 접촉 안 되게끔 경계한 것이라고 느꼈을 수 있다. 그런 직감을 느끼지 않았다면 니콜로프가 굳이 기자회견 말미에 "한국의 <애국가> 몇 소절이 나의 모국 불가리아 민요와 유사하다"는 폭로성 발언을 강행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가 기자회견장에서 한국 <애국가>의 곡조 유사성 문제를 공개적으로 발표한 것은 우발적인 '엉뚱한 언동'이 아니라 작심하고 내놓은 '준비된 폭로'라는 것, 이것이 팩트에 가깝다.

숱한 난관(難關)을 뚫고 개최되어온 국제음악제는 안익태의 애착과 노심초사(勞心焦思)에도 불구하고 서울시의 지원 거부와 연주단체들의 비협조, 공연장 미확보 등 제반 문제로 말미암아 더 이상 지속되지 못하고 중단된다. 이러한 사태가 외화 부족 등 재정문제 때문인지, 아니면 안익태의 지휘권 남용 등 독선적인 태도와 그로 인한 국내 음악인들과의 불화 때문인지, 혹은 어떤 정치적 이유 때문인지(쿠데타를 혁명으로 홍보하는 문화 '프로파간다'에 앞장섰다가 팽 당한 것인지), 아니면 그같은 여러 원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인지, 나로서는 그 이유를 단정하여 말하기 어렵다. 어떻든 1965년 일시 귀국하여 제4회 국제음악제를 추진하던 안익태는 행사가 끝내 무산되자 박정희 대통령 앞으로 한 통의 편지를 남기고 스페인으로 돌아갔다고 하는데, 편지의 내용이 안익태의 음악 행동이 갖는 프로파간다적 성향을 직접 드러내고 있는 바, 그 일부를 소개하면 이렇다.

"제 1, 2, 3회를 계속한 서울국제음악제를 5월 혁명정신의 계승으로나, 제1회 국제음악제가 혁명 1주년 기념으로 시작되었다는 점으로 보나, 박 대통령의 성원으로 시작되었다는 점으로 보나, 계속되어야 할 국제적인 행사임에도 불구하고..... 부득이 중단하지 않을 수 없음을 안타깝게 생각하며, 내 조국에 하루속히 음악문화정책이 확립되어지기를 바라며 떠나가렵니다."
그리고 그해 9월, 안익태는 바르셀로나의 한 병원에서 생을 마감한다.

국내·외 음악학자들 간에 벌어진 <애국가> 표절 논쟁

1) 제임스 웨이드의 '안익태 애국가' 표절론(剽竊論)

1964년 돌발했던 피터 니콜로프의 <애국가> 표절 시비는 그 당시 일반인들에게는 별 관심을 끌지 못했다. 그런데 이 기자회견 장면을 목격한(또는 회견을 방조한) 사람 중에 끈질기게 이 문제를 추적한 미국인이 있었다. 제임스 웨이드! 그는 미국 아메리카 음악대학(American Conservatory of Music)에서 작곡과 이론을 전공한 음악평론가로, 1964년 당시 한국 <코리아 타임스>와 <코리아 저널>의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었다. <애국가> 표절 시비 장면을 구체적으로 목격한 그는 '코리아 타임스'지를 통해 캘리포니아 대학 음악과의 불가리아계 미국인 보리스 크레만리예프 박사로부터 불가리아 민요 '오, 도브루잔스키 크라이'의 사본을 한 부 입수했고, 이를 바탕으로 그는 <애국가>와 '오, 도브루잔스키 크라이'와의 선율 유사성을 분석한 소논문을 발표하였다.

이 소논문은 전문성을 요하는 분야여서 일반인들이 이해하기 쉽지 않은고로, 독자들을 위해 상식적 수준에서 쉽게 그 논지를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① 시간과 장소가 멀리 떨어진 수많은 음악 작품 간에 우연적 혹은 무의식적인 유사점이 생길 수 있다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다. 그러므로 법 앞에서는 표절을 입증하기 위하여 원작으로부터의 '본질적인 복사'가 증빙(證憑)되어야 한다. 그리고 '본질적인 복사'를 증빙하기 위해서는 먼저 '접근성'에 대한 증명(證明)이 또한 필요하다. 다시 말해 표절자가 그가 훔친 음악을 보았거나 들을 수 있었던 기회를 가졌는가 하는 것이 증명되어야 한다.

② 그러나 만일 음악 내부에서 충분히 납득할만한 증거가 있다면, '본질적인 복사'나 '접근성' 등 상기 요건들은 필수적 조건이 되지 않는다.

③ '오, 도브루잔스키 크라이'와 <애국가>의 유사성은 두 노래의 첫 여덟 마디(첫째 소절과 둘째 소절)에 압축된다. 그런데 <애국가>에서는 이 중 둘째 소절이 마지막 넷째 소절에 다시 반복된다(A-B-C-B 구성). 그러므로 <애국가>의 전체 열여섯 마디 중 열두 마디가 유사성을 보이고 있다(한 소절 = 네 마디).

④ 다만 차이점이라고 한다면 두 노래에 있어 각 마디(갖춘마디와 못갖춘마디)의 강약이 다른 점이라고 할 수 있는데, <애국가>의 경우 특히 첫 마디에서 강약의 마디가 잘못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작곡자가 멜로디를 지을 때 노랫말에 바탕하여 작곡을 했다기보다 다른 노래의 곡조에다 노랫말을 입힌 증거일 수 있다.

(이게 무슨 말인지 일반인들은 이해하기 쉽지 않다. 쉽게 설명하자면,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에서 안익태 곡조는 '동'이 약박이고 '해'가 강박이어서 '동해의 물'이어야 할 가사가 '동쪽의 해물'처럼 들린다는 말이다.)

⑤ <애국가>의 A 소절 B 소절은 불가리아 민요의 A 소절 B 소절과 거의 같은 음으로 진행된다. 그리고 이 유사음들은 몇 개의 두드러진 동기(모티브motive)로 묶여 있는데, 이 동기들은 선율적으로나 리듬적으로 동일성을 보여준다. 이 정도의 유사성(동일성)을 우연의 일치라고 보기는 어렵다.

나는 제임스 웨이드가 분석한 여러 비교들이 전문적이고 객관적일 뿐 아니라 상식적인 수준에서 매우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이 소논문은 아직까지도 <애국가> 표절 시비의 중요 증거자료로 채택되고 있지 못하다.

2) 이유선의 '안익태 애국가' 배제론(排除論)

제임스 웨이드가 발표한 소논문은 당시 안익태에 비판적이었던 음악계 일부 인사들 사이에 공유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들 중에 이유선이라는 음악인이 있었다. 이유선은 당시 중앙대학교 교수로 안익태와 같은 시기 미국에서 성악과 오페라를 전공하고 돌아온 유학파 음악인으로, 서울국제음악제에서는 실행위원 중 한 명이었다. 그러던 이유선 교수가 1976년 정년퇴임 기념으로 <한국양악백년사>라는 기념비적인 책을 냈는데, 그 책에 '양악의 선구자들'을 열거하면서 안익태도 그 중 1인으로 소개한즉, 글 내용이 빌미가 되어 잠잠하던 <애국가> 표절 시비가 다시 한번 요란한 논쟁으로 번졌다. 그 과정을 설명하기 위해 먼저 이유선의 <애국가> 관련 글 내용을 소개하면 이렇다.

"안익태의 작곡이라고 된 현 우리 애국가는 1937년경 불가리아 여행시 얻은 멜로디를 살린 것으로 알려져 한때 잡음이 컸었지만, 어찌했던지 엄연히 우리 대한민국은 완전한 민주독립국가이니만큼 하루속히 국가(國歌)를 제정해야 할 것이다. 남북통일 후에 제정하자는 일부 인사의 말이 통하여 아직까지 보류된 것은 유감이 아닐 수 없다. 현 애국가는 일제시 우리나라에서는 도저히 부를 수 없었으나 작곡자 安은 시카고에서 공부하던 필자와 그의 친우 한장호에게 작곡(멜로디만)을 1937년경에 보내면서 동포끼리 먼저 부르게 하자 하여 필자가 우리 동포들에게 가르쳤으니, 아마도 그것이 처음 이 곡이 불리어진 것으로 생각된다."(<한국양악백년사>(이유선 지음, 중앙대학교 출판국 펴냄) p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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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3. 1976년 간행된 <한국양악백년사>(이유선 지음, 중앙대학교 출판국 펴냄) 초판 표지.



이유선의 글을 보면 <애국가>에 관한 내용이 우선 많지 않고, 안익태에 대해 그다지 공격적이지도 않다. 이를테면 그는 '표절'이라는 자극적인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고 불가리아 멜로디를 '살린' 것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사실 안익태와 동향이고 음악계의 후배이며 더구나 미국 유학 시절 안익태가 작곡한 애국가 멜로디를 받아 동포들에게 직접 가르치기도 했으니 두 사람은 매우 가까운 사이라 볼 수 있다. 오히려 그렇게 잘 아는 사이이기 때문에 이유선은 안익태에 대한 몇 가지 판단을 당연하게 전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나는 "안익태가 작곡했다는 애국가 곡조는 불가리아 민요의 멜로디를 살린 것"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안익태는 그 민요를 1937년경 불가리아에 여행 가서 접했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유선이 이렇게 확신한 근거는 무엇일까? 우선 보리스 크레만리예프 박사가 제임스 웨이드에게 보내준 '오, 도브루잔스키 크라이'의 악보였을 테고, 거기에 제임스 웨이드가 애국가와 불가리아 노래를 비교하여 작성한 소논문에 학문적으로 동의했기 때문일 것이다. 거기에 미국 유학 시절 한국 유학생들의 동향을 잘 알고 있던 그가 안익태의 불가리아 여행을 '있음직한 상황'으로 전제했을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 부분, "안익태가 그 불가리아 민요를 1937년경 여행 가서 접했을 것"이라는 정황 판단에 중대한 오류가 있었다. 뿐만 아니라 안익태가 애국가를 작곡한 시기는 1936년 정월 5일 이전이라는 사실이 얼마 후에 명백하게 밝혀졌다. 그러므로 ''본질적인 복사'를 증빙하기 위한 '접근성'의 증명'에 있어 이유선의 전제에 결정적인 오류가 있었던 것이다.

이 부분은 잠시 후 다시 거론하겠거니와, 어떻든 이유선은 그러한 정황 판단에서 "이제 민주독립국가가 된 우리가 남의 나라 민요 곡조로 만든 애국가를 계속 부르는 것은 부당하다"는 생각에 하루 속히 국가(國歌)를 제정하자는 쪽으로 방향을 제시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한국양악백년사>의 출간이 몇몇 신문에 보도되는 과정에서 학술서로서의 평가보다는 '안익태 애국가' 관련 부분만 부각되면서 표절 시비가 다시 한번 일파만파(一波萬波)로 번져나가게 된다. 한국일보 등 당시 신문기사들의 논조(論調)는 대체로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한국양악백년사>에 따르면 안익태 작곡으로 된 '애국가'는 불가리아 민요곡으로, 이유선 교수는 안익태가 1937년 불가리아에 여행할 때 들은 민요곡을 기록했다가 되살려 만든 곡이 현재의 우리나라 '애국가' 곡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사실은 지난 서울국제음악제에 초청됐던 피터 니콜로프에 의해 확인된 바, 이 같은 주장이 사실이라면 우리나라의 독창적인 국가(國歌)를 새로 제정해야 한다는 여론이 제기되고 있다.

3) 애국가 표절 시비에 대한 '안익태기념사업회'의 대응

이렇듯 <애국가> 표절 시비가 국가(國歌)를 새로 제정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확대되자, 이에 적극 대응하여 나선 단체가 안익태기념사업회(현재 안익태기념재단의 전신)였다. 안익태기념사업회는 이유선 씨에게 서한을 보내어 "차제에 <애국가>의 표절설 여부를 가리고자 하니 이 교수가 가지고 있는 불가리아 멜로디와 양 선율을 대비한 악곡 분석 설명을 기념사업회에 보내달라"고 요청하였다. 이에 이유선은 불쾌한 감정으로 자신의 글에는 표절이라든가 하는 악의에 찬 표현이 없음을 상기시키며, 불가리아 민요곡과 <애국가>를 비교한 제임스 웨이드의 문건을 동봉하여 보낸다.

그러자 기념사업회 측은 작곡가 공석준(당시 연세대학교 음악대학 강사, 숙명여대 교수, 후에 연세대학교 교수 역임)에게 관련 자료들을 보내어 <애국가> 표절 여부를 가리는 악곡 분석을 의뢰한다. 이때 제공된 자료는 이유선의 <한국양악백년사>, 제임스 웨이드의 소논문, 김경래 저서 <안익태 전기(傳記)> 등이었다고 하는데, 그 외에 주목할 문건이 하나 더 첨부되어 있었으니 그것은 미주(美洲)에서 발행된 '1936년 정월(正月) 5일 자 안익태의 자필 사인이 있는 <대한국 애국가> 원본'이었다. 이 자료는 애국가 표절 시비에 있어 안익태기념사업회의 주장을 입증하는 중요한 증거물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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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6년 안익태의 자필 사인이 있는 <애국가> 원본 표지. 출처 : <안익태>(전정임 지음, 시공사 펴냄) p111.



안익태기념사업회가 의뢰한 사안에 대해 공석준은 두 노래를 비교 검토하여 '<애국가> 표절 시비에 관한 소고(小考)'라는 결과를 회신하여온 바, 그 내용을 보면 '안익태 작곡 <애국가>는 불가리아 민요의 표절이 될 수 없다'는 분석 결과와 함께, 오히려 '안익태 <애국가>를 하루빨리 정식 국가(國歌)로 제정하는 작업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의견을 담은 것이었다. 그러자 안익태기념사업회는 공석준의 이 소고(小考)를 앞세워 정부 각 부처와 국회에 진정서를 제출한 바, 그 내용을 축약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본 사업회는 해방 후 30여 년간 <애국가>가 국가(國歌)의 위치에서 그 구실을 해온 현실을 중시하여 차제에 태극기와 더불어 나라의 상징으로 쓰여온 <애국가>의 표절설 여부를 확실하게 가리는 것이 전 국민과 국가 권위에 대한 보답인 것으로 생각합니다..... 공석준 씨의 분석내용에 따르면, 이유선 씨와 제임스 웨이드 씨의 <애국가> 표절설이 극히 비논리적이고 부당하게 남의 작품을 모독했으며 국가(國家)의 권위마저 손상시킨 결과가 되었으므로, 이러한 불미스러운 여론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조치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이에 대해 문화공보부는 "애국가가 모든 의식(儀式)에서 실제상 국가(國歌) 역할을 해온 점을 감안할 때 명확한 근거 없이 표절 여부를 논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니라고 판단된다"는 회신을 보내왔고, 국회 사무처 역시 "애국가가 실제상 국가(國歌)의 역할을 해온 점을 감안할 때 명확한 근거 없이 표절 여부를 논하는 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이므로, 금후 <애국가>의 권위를 손상시키는 불미스러운 일이 없도록 정부당국에 강력한 조치를 촉구하겠다"는 내용의 회신을 보내왔다.

이 때가 1976년, 당시 '안익태기념사업회'의 대표는 모윤숙 씨를 비롯한 3인이었다. 모윤숙 씨가 누구인지는 인터넷 들어가면 지금 당장 알 수 있다. 이렇듯 모윤숙 씨를 위시(爲始)한 '안익태기념사업회'의 적극적인 '정치적' 대응이 상당한 효력을 발휘하면서 안익태 <애국가> 표절 시비는 무력(無力)하게 다시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4) 공석준의 '애국가 표절 시비에 관한 소고(小考)'에 대한 소고(小考)

<애국가> 표절 시비에 대한 안익태기념사업회의 적극적 대응이 상당한 효력을 발휘한 것은 결국 '정치적 영향력'과 무관하지 않지만, 어떻든 거기 명분을 준 근거는 무엇보다 작곡가이자 대학교수였던 공석준의 논문 '<애국가> 표절 시비에 관한 소고'였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나는 공석준의 소고가 지니고 있는 몇 가지 시사점(示唆點)과 문제점을 고찰해보고자 한다.

공석준의 글은 크게 '작곡학적 면'과 '사실적(史實的) 면' 두 단락으로 전개되고 있다. '작곡학적 면'과 관련해서는 다음 항(項)에서 본격적으로 점검을 시도할 터이나, '사실적(史實的) 면'에서의 논거는 우선 공석준의 설명이 대단히 명확함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앞서 나는 안익태기념사업회가 입수하여 공석준 교수에게 제공한 '1936년 안익태의 자필 사인이 있는 애국가 악보 원본'을 언급한 바 있다. 이 악보 자료는 로스(Ross)라는 미국 여성이 갖고 있던 것인데, 그녀는 안익태와 함께 필라델피아 음대를 다닌 동창생 피아니스트로 안익태의 첼로 반주자였다고 한다. 이는 안익태가 1935년 겨울 애국가를 작곡한 후 그 보급을 위해 제작한 최초의 악보로 1936년 정월(正月) 5일 로스 씨에게 우정의 뜻으로 선물한 것이라 한다. 그것을 로스 씨가 보관하다가 1968년(안익태 사후) 세계여행 중 한국을 방문하면서 지인에게 놓고 간 것이라 한다.

이 '안익태 자필 <대한국 애국가> 악보 자료'는 표절 시비에 있어 안익태기념사업회의 주장을 입증하는 중요한 증거물이 된다. 왜냐하면 애국가의 작곡 연대가 1936년 정월 이전이라면, 이유선 교수가 전제한 '1937년 안익태의 불가리아 여행'은 표절을 증빙하는 '본질적인 복사' 또는 이에 필요한 '접근성'을 전혀 충분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안익태기념사업회가 공석준을 통해 제시한 '1936년 안익태 자필 악보 자료'는 이유선이 제시한 '애국가 작곡 전(前) 1937년 불가리아 여행'이라는 정황 근거를 배척(排斥)하는 핵심적인 물증인 것이다.

그러나 여기 다시 문제점이 남는다. 제임스 웨이드가 제시한 또 하나의 원칙, '만일 음악 내부에서 충분히 납득할만한 증거가 있다면, '본질적인 복사'나 '접근성' 등 요건들은 필수적 조건이 되지 않는다'는 본원적 조건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공석준도 이런 문제점을 의식했는지 다행히도 다음과 같은 견해를 글 속에 남겨놓았다.

"귀중한 <대한국 애국가> 악보를 확인한 바로는 말썽의 불가리아 방문과는 수년 전의 일이 된다. 문헌에 의하면 불가리아 작곡가 '스토인'과 '크리스도포'가 민요집을 정리 발간한 적이 있으나 그 연대는 알 수 없다. 고로 안익태 씨가 불가리아와는 관계없이, 독보(讀譜)에 의한 참고 여부는 확인할 길이 없다."
즉, 공석준도 안익태가 작곡 전에 불가리아에 간 일이 없더라도 불가리아의 누군가가 정리 발간한 민요집을 참고했을지는 알 수 없다는 말로 간접적이나마 '접근성'의 가능성을 전면 부정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아마도 공석준 교수가 참고한 <안익태 전기> '영광과 슬픔'에 나오는 이 구절을 아무래도 떨쳐버리기 어려웠을 수 있다.

"필라델피아의 커티스 음악학원에서 작곡을 공부할 무렵 익태는 무려 40여 개국의 국가를 수집하여 연구에 착수했다. 뿐만 아니라 세계 각국의 민요, 가곡, 성가곡들도 모아 애국가 작곡을 위한 기초자료로 삼았었다."(코리아 환상곡, 안익태의 영광과 슬픔, 현암사, 1966, 132쪽)
그렇다면 <애국가> 표절 시비에 있어 제임스 웨이드가 제시한 원칙, ''본질적인 복사'를 증빙하기 위해서는 먼저 '접근성'에 대한 증명(證明), 즉 표절자가 그가 훔친 음악을 보았거나 들을 수 있었던 기회를 가졌는가 하는 것이 증명되어야 한다'는 원칙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봐야 한다.

뿐만 아니라 제임스 웨이드가 제시한 또 다른 원칙, '만일 음악 내부에서 충분히 납득할만한 증거가 있다면, '본질적인 복사'나 '접근성' 등 상기 요건들은 필수적 조건이 되지 않는다'는 원칙이야말로 향후 '안익태 애국가' 표절 시비를 가리는 관건(關鍵)이 될 것이다.

이제 좀 다른 관점에서 공석준의 소고(小考)에 대한 문제 제기를 해보려 한다. 그것은 시비(是非) 당사자인 안익태기념사업회가 개인 공석준에게 의뢰한 과정 자체가 객관적인 요건을 갖추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이다. 요새 말로 하자면 셀프(self) 용역을 준 셈인데, 그 소고의 주장이 옳든 그르든 그 결론 내용을 공인(公認)된 결과물로 인정할 수 있겠는가 하는 근본적인 문제점이 있다.

공석준은 소고(小考) 말미에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이스라엘 등 세계 각국의 국가(國歌)들을 열거하면서, 그 결론으로 "<애국가>가 국가(國歌)의 대행 역할에서 보다 적극적인 자세로 발돋움하여 정식 국가(國歌)로 제정 공포되어야 한다"는 견해까지 표명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표절 시비를 가려달라'는 의뢰의 영역을 벗어나는 발언으로, 이 소고(小考)가 '정치적 성격이 가미된' 셀프 용역이었음을 스스로 드러냈다고 볼 수 있다.

5) 홀연히 등장한 김정희의 '안익태 애국가' 표절론(剽竊論)

<애국가> 표절 시비가 다시 수면에 떠 오른 것은 1976년 이후 40여 년의 세월이 흐른 2019년, 3.1혁명 100주년과 대한민국임시정부 100주년을 맞은 해였다. 그리고 이렇듯 애국가 표절 시비가 다시 부각된 시기는 우연히도 안익태의 친일 · 친나치 행각이 만천하에 공개된 시기(이해영의 '안익태 케이스')와 맞물려서였다.

국악작곡가인 김정희 교수(한국예술종합학교)는 작년(2019년) 8월 8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안익태 곡조 애국가 계속 불러야 하나?'라는 공청회(안민석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장 주최)에서 '안익태의 표절과 변절'이라는 주제를 통해 애국가 표절 시비를 다시 수면으로 들어 올렸다.

프레시안

▲ 2019년 8월 국회에서 열린 '안익태 곡조 애국가 계속 불러야 하나?' 공청회 포스터.



발제의 요지는 안익태의 애국가 곡조는 음악학적으로 불가리아 민요 '오, 도브루잔스키 크라이'를 표절한 것이 분명하며, 그의 대표적인 교향곡 '코리아판타지'가 1938년 이래 교쿠토(極東), 만주환상곡, 토아(東亞)를 거쳐 광복 후 다시 '한국환상곡'으로 계속 변개(變改=자기표절)되어 온 것이 그의 변절(變節)에 관련된(종속된) 것이라는 날카로운 시각을 제시하였다. 그리고는 작년 12월, <애국가> 표절 문제를 음악학적으로 집중해서 '안익태 <애국가>, 표절인가 아닌가?'라는 제목으로 공식 논문을 발표하였다(한국예술종합학교, 한국예술연구 제26호, 2019. 12).

김정희 교수는 이 논문에서 '안익태 애국가'와 불가리아 민요 '오, 도브루잔스키 크라이'에 대한 기존의 제임스 웨이드와 공석준의 표절논쟁을 검토하면서 음악학적(작곡학적)으로 제임스 웨이드의 분석을 지지하고 공석준의 논리를 배척하는 방향을 견지한다. 이에 관련된 분석 내용 역시 음악적 전문성을 필요로 하는 바, 두 사람의 논쟁 내용과 김 교수의 비교분석 내용을 나 나름대로 해석해서 되도록 쉽게 설명해보면 다음과 같은 요지이다.

① 제임스 웨이드는 "두 곡의 유사성은 <애국가>의 첫 8마디(두 소절)에 압축되며 이 중 둘째 소절은 넷째 소절에 반복되므로 전체 16마디 중 12마디가 유사하다(75%)고 분석했는데, 공석준은 "<애국가>는 원래 16마디(4소절)로 되어있고 불가리아 민요는 24마디(6소절)로 되어있어 반복되는 부분을 빼고 나면 24마디 중 8마디가 유사하다(33%)"는 황당한(?) 주장을 하고 있다.

② 제임스 웨이드는 "두 곡이 갖춘마디와 못갖춘마디(센내기와 여린내기)의 서로 다른 배치로 인한 강약의 차이가 있을 뿐 선율형은 동일하다"는 견해를 내놓았는데, 공석준은 "강박 약박이 달라지면 본질적으로 다른 판도를 그리게 되므로 선율이 같아도 선율구조는 다르다"고 강변(?)하고 있다.

③ 제임스 웨이드는 "두 곡이 A 소절 4마디와 B 소절 4마디에서 같은 높이의 음(音)으로 거의 같은 순차적 진행을 보이고 있다"고 보았는데, 공석준은 "두 곡의 강약 구조가 엇갈려 있고 화성이 다르므로 설혹 순차적으로 진행된다 하더라도 공통음으로 볼 수 없다"는 복잡난해한(?) 해석을 하고 있다.

전문적인 음악 식견이 없더라도 상식적인 수준에서 볼 때, 공석준의 논문은 "두 곡 사이에 유사한 부분도 있지만 독자적 부분도 있으니 표절이라 볼 수 없다"는 식의 '아전인수'격 주장을 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두 곡 사이에 독자적 부분이 전혀 없다면 그건 복사(複寫)이지 표절(剽竊)이 아니다. 완전한 복사(複寫)가 아니면 표절(剽竊)로 볼 수 없다는 해괴한 논리, 참으로 어처구니없게 느껴진다.

안익태 <애국가> 곡조 표절 시비를 종식(終熄)시키기 위해서는 표절 감정(鑑定) 전문음악인들로 하여금 공인된 연구조사를 통해 결론을 얻어내도록 하는 공식적인 과정이 꼭 필요하다고 본다. 우선 이를 위한 공개 토론회부터 열리기를 기대하며, 오늘은 일단 독자들의 궁금증을 조금이나마 풀어드리기 위해 김정희 교수가 도표화하여 제공한 <애국가>와 '오, 도브루잔스키 크라이' 선율 비교 악보를 다시 한번 수록해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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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6. <애국가>와 '오, 도브루잔스키 크라이' 선율 비교 악보(김정희 교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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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택 문화운동가, 창작 판소리 명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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