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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03 (월)

[더오래] 코로나가 알려줬다, 내가 스포츠 마니아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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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 박헌정의 원초적 놀기 본능(67)



꽃구경, 축제 인파, 길거리 공연, 막히는 도로, 프로야구 개막전… 코로나19의 광풍 때문에 사라진 봄 풍경들이다. 누군가에겐 생계일 수도 있고 누군가에겐 비타민 같은 활력소가 될 많은 일이 자취를 감추었다.

3월 말, 겨울철 실내스포츠가 마무리되고 실외 종목이 시작될 때다. 그런데 모든 스포츠 이벤트가 중단되고 보니 그동안 알게 모르게 스포츠가 생활 속에서 차지하던 비중이 컸음을 느끼게 된다.

지난 1~2월, 필요 없는 이동을 자제하라고 할 때만 해도 특별히 걱정은 없었다. 갈 곳 없는 몸이니 종일 집에서 책 보고 글 쓰고 집안일 하다가 일찌감치 저녁 먹고 TV로 배구 중계를 보면 하루가 잘 지나갔다. 그런데 사태가 심각해지면서 배구와 농구 무관중 경기가 치러지더니 아예 리그가 중단되었다. 그래도 저녁이나 새벽 시간의 EPL 축구, NBA 농구, PGA 골프처럼 익숙한 해외 스포츠 덕분에 그럭저럭 볼 게 있었다. 하지만 이마저도 중단되고, 기대하던 류현진의 메이저리그(MLB) 개막전은 미뤄졌다. 이제 TV나 인터넷의 스포츠 섹션을 차지한 것은 바둑, 당구, e스포츠…. 치열한 두뇌 싸움은 있지만 팬들의 흥분, 열광, 함성과는 거리가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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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장에도 자주 찾아다니며 스포츠 관람을 즐겼지만 언제부턴가 TV중계에 만족하고 그 마저도 건성으로 보다가 이번에 스포츠 생중계가 일시에 중단되면서 스포츠가 그 동안 내 생활에 얼마나 중요한 활력소였는지 깨닫게 되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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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사로서는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다. 예전 경기의 재탕, 삼탕을 넘어 이제 30년 전 낡은 화면까지 찾아내 ‘명승부 하이라이트’라며 내보낸다. 물론 우리 선수의 쾌승 장면이라 한번 빠져들면 시간은 후딱 지나간다. 그것도 한두 번이지 이제 다 외울 정도가 되었다. 게다가 화질 흐릿한 옛날 화면을 보고 있자면 시간 속에 갇힌 느낌이 들어 갑갑하다.

이제부터가 더 문제다. 개별종목은 언젠가 재개되겠지만 당장 7월의 올림픽이 물 건너간 것 같다. 낭패감을 겪을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반쪽으로 치러진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 이후 정치적 개입을 철저히 배제해왔기에 올림픽만큼은 인류가 잘 지켜나갈 줄 알았다. 그런데 바이러스가 훼방 놓을 줄이야.

생각해 보니 그동안 스포츠는 늘 우리 곁에 있었다. 많은 사람이 스포츠광(狂)까지는 아니어도 애호가로서, 나름대로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중계를 챙겨보거나 경기장을 찾아 ‘직관(직접 관람)’한다.

한때는 나도 그랬다. TV 드라마나 예능에 관심 없어 자연스레 스포츠 중계만 찾는데, 해설을 들으며 경기 읽는 눈은 물론 비인기 종목에 대한 지식도 점점 늘었다. 그 결과 몸 대신 입으로 스포츠맨이 되었으며 자연스레 아내의 전담 해설위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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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 이벤트가 중단되면서 방송사들은 오래 전 경기를 다시 내보낸다. 이미 끝난 승부라 흥미도 떨어지고, 화질 흐릿한 옛날 화면을 보고 있자면 시간 속에 갖힌 느낌이 들어 갑갑하다. [중앙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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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기왕성하던 시기에는 우리 팀이 지면 흥분하고, 안현수나 김연아가 억지 판정으로 금메달 뺏길 때는 분노에 몸서리쳤지만 이제 그런 흥분도 쉽게 가라앉는다. 그저 스포츠가 가까이 있으니 시간 때우는 용도로 편하게 ‘소비’할 뿐이다. 게다가 한계효용체감의 법칙도 작용한다. 스포츠 이벤트가 좀 많은가. 웬만한 허슬플레이에는 내성이 생기고, 그 세계 내면의 피 튀기는 경쟁과 절실함에도 점점 무신경해진다. 어쩌면 스포츠에 대한 흥미가 떨어지는 것도 노화의 한 현상 아닌가 싶다.

그러다가 이번에 스포츠 생중계가 사라지고 보니 너무나 심심했고, 내가 여전히 스포츠를 즐기고 있음을 깨달았다. 뭐든 귀하면 소중해진다. 3월 초에 아시아 챔피언스리그 수원 삼성과 말레이시아 팀 축구경기 중계가 있었다. 평소 국가대표 A매치나 손흥민 출전 경기 정도만 챙겨보다가 얼마나 재미있게 보았는지 모른다.

며칠 후 새벽, PGA투어에서 선두였던 강경훈이 잉글랜드 선수에게 점점 따라잡히는데, 퍼팅할 때마다 내 어깨가 움찔거렸다. 골프 역시 박인비의 올림픽 우승 때 외에는 이렇게까지 응원해본 적 없다. 여기까지가 생중계 시청의 끝이다.

이후에는 예전 경기 가운데 씨름, 컬링, 배드민턴, 핸드볼 같은, 상대적인 비인기 종목들을 자주 보았다. 그런데 생중계든 예전 화면이든, 오랜만에 경기에 빠져들어 집중하니 선수들이 이기기 위해 힘과 지략을 쥐어짜 내고, 나아가 악쓰고 반칙까지 불사하며 절실하게 매달리는 모습이 다시 눈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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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껏 이렇게 지루하고 답답한 봄은 없었다. 빨리 코로나19가 종식되고 스포츠 이벤트가 재개되어 경기장에서 햇살과 함성을 즐기고 싶은 마음이 가득하다. [사진 pexe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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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선수는 정말 강한 인간이다. 오늘의 승패를 내일로 연장해서는 안 되고, 언제나 그 순간의 승부 속에 존재한다. 그러니 몸도 강하지만 마음은 더 강하다. 선린상고 야구부 출신인 부하직원과 일한 적 있는데 한번 틀어진 일은 미련 없이 접는 것을 보고 그 냉정함에 매료되었다. 오랜 연패를 당해도 무표정하게 경기에 임하고 힘들게 이긴 후 눈물을 참지 못하는 감독을 보면 그들도 사람인데 말이다.

어쩌면 스포츠는 일상 속에서 무뎌진 우리의 감각을 속여 한 번씩 흥분하고 끓어오르게 만들 목적으로 정교하게 설계된 가상의 전쟁 아닐까 생각해본다. 정해진 룰 안에서 선수는 야수 같은 공격본능을 최대한 표출해서 상대를 제압하고, 팬들은 거기 감정을 이입해서 본능 속에 잠자던 투쟁심을 꺼내본다.

그러다 가끔 야성을 넘어 광기까지 보이지만 그렇게 한 번씩 미쳐보면서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것, 그게 스포츠 아닐까. 정말 더디게 지나가는 이 봄, 어서 코로나가 종식되고 스포츠계가 제 궤도를 찾아 활력 넘치는 승부 세계를 볼 수 있으면 좋겠다.

수필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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