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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6 (수)

[시선2035] “아뇨, 국민 의견이 그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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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김준영 중앙홀딩스 커뮤니케이션팀 기자


영국의 근미래(2019~2034년)를 그린 BBC·HBO 합작 드라마 ‘이어즈&이어즈’(Years&Years, 2019)에는 혼란한 정세 속 거물이 되어가는 정치인 비비안 룩(엠마 톰슨 역)이 나온다. 기업가 출신인 그가 정치인으로 성공하는 과정은 간단하다. 더 많은 국민에 편승해 편을 가르는 것. TV 토론회에 나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관계 같은 국제 정세엔 “신경 전혀 안 쓴다”며 “저는 우리 집 쓰레기만 매주 수거되면 바랄 게 없다”고 한 발언이 그의 사이다 어록 출세작이다.

스스로 제3정당(사성당)을 차려 당수가 되고, 보궐선거로 국회 입성에도 성공한 그는 “다음 총선에선 IQ 70 이상의 국민에게만 투표권을 부여하자”는 말도 서슴지 않는다. 놀란 사회자가 “멍청한 국민은 투표하면 안 된다는 말이냐”고 쏘아붙이면, 그는 지긋이 카메라를 바라보고 관조하듯 읊조린다. “아뇨, 국민 의견이 그래요. 직장·가정·술집에서 수백만 명이 뱉는 말이죠.” “그렇죠? 다들 그렇게 얘기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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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즈&이어즈’ 속 정치인 비비안 룩. [사진 BBC 홈페이지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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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드라마에선 흠칫한 장면이 곧잘 나온다. 비비안 룩이 첫 총선에서 낙선한 후 “언론은 거짓말을 한다”며 자신의 유튜브 채널로만 대중과 소통하는 모습이나 당장 시민들이 좋아할 만한 정책 남발로 지지율을 끌어올리는 걸 보면, 유력한 우리 정치인들 이름 몇몇이 머릿속을 스치곤 한다. 가장 무서운 장면은, 어느 의견이든 1%라도 더 지지받으면 곧 정의가 되고 나머지 최대 49%는 묵살되는 흐름이다.

여론조사로 말이 많은 요즘이다. 당장 4월 6일 초·중·고 개학 여부도 여론조사로 결정한다고 한다. 방역 전문가와 교육 당국자가 합심해 최선의 방법을 고심·결정해야 할 판에, 민간에 책임을 돌렸다. 하긴, 지난 2개월간 정부의 코로나19 대처 방안도 전문 집단의 의견보단 여론조사 평가로 좌우되는 경향이 있었다. 소설가 김훈은 지난해 모교 행사에서 “여론조사 결과가 정의·진리가 되는 건, 무지몽매한 세상으로 가는 시작”이라고 했다. 이러다 청와대가 여론조사 추이로 코로나 종식 선언 여부도 결정하는 게 아닐지 걱정하는 건 기우일까. (문 대통령은 제1야당 대표 시절 국무총리 후보자 인준안 처리를 여론조사로 정하자고 했었다.)

다시 드라마를 이어가면, 사성당은 2024년 총선에서 15석 확보로 돌풍을 일으키고, 훗날 비비안 룩은 총리에 오른다. 그 사이 환경문제는 돌이킬 수 없게 악화하고 이주민을 대량 학살하는 집단 수용소의 등장, 빈곤 지역에 대한 물리적 격리 정책 등이 난무하는 미친 세상이 도래했다. 그래도, 총리의 인기는 대단하다.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보고 선택하고 몸소 겪은 주인공 가족의 할머니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 탓이 맞아. 우리가 만든 세상이야”라고. 장르는 지독한 디스토피아다.

김준영 중앙홀딩스 커뮤니케이션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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