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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7 (금)

이슈 미술의 세계

이 작품, 꼭 사야 한다… 1년 예산 올인한 시골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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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근 대표작 '나무와 두 여인' 7억8750만원에 양구 품으로…

"郡 위한 작품" 만장일치 승인, 소장자도 1억 넘는 통 큰 할인

조선일보

"반드시 사야 합니다."

지난달 박수근(1914~1965)의 그림 한 점이 시장에 매물로 나왔다. 1950년대 중반 그린 '나무와 두 여인'<삽화 속 사진>이었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강원도 양구의 박수근미술관 엄선미 관장은 급히 서울로 향했다. 유명 재계 컬렉터 집안이 소유한 이 그림이 시장에 나온 건 42년 만이었다. 헐벗은 겨울나무 곁을 지나는 두 여인을 그린 '나무와 여인' 시리즈로, 값은 9억2000만원 수준이었다. 박수근의 대표작은 거래가 잦지 않고 경매로 구할 경우 값이 너무 뛰어 시골미술관은 엄두를 내기 어렵다. 실물을 본 엄 관장은 박수근의 장남 박성남(73)씨를 통해 진위 여부를 검증한 뒤 다음 날 양구군청에 "이 작품은 꼭 잡아야 한다"는 보고서를 올렸다.

박수근 이름을 딴 미술관이지만, 이곳이 소장한 유화는 겨우 12점이었다. 그중 3점은 기증받은 것이다. 엄 관장은 "보유작은 적어도 귀로·일상·정물 등 주제별 분류마다 대표작 한 점은 있어야 위상이 서는데 '나무와 여인'만 없었다"며 "이걸 넣어야 컬렉션의 퍼즐이 완성되는 상황이었다"고 말했다. 특히 소설가 박완서 '나목(裸木)'의 영감이 된 작품으로, 전후 민족 정서를 담아 의미가 깊다. "나목에겐 아직 멀지만 봄에의 믿음이 있다"고 박완서는 소설에 썼다.

문제는 돈. 작품 구매 예산은 미술관 3억원, 양구군청 문화관광과 5억원이 배정돼 있었다. 1년치 구매 예산 8억원을 27×19.5㎝짜리 손바닥만한 그림에 몽땅 부어야 했다. 코로나 사태로 소비 심리는 잔뜩 위축된 상황. 하지만 반응은 의외였다. "군수 및 군의원 등 모든 공무원이 '지역 발전을 위해 그림이 꼭 필요하다'며 만장일치 승인했다"는 것이다. "박수근의 그림이 인구 2만3000명 휴전선 접경 지역으로 타지 사람을 불러들이는 문화 브랜드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얘기를 들은 소장자도 "많은 사람이 볼 수 있길 바란다"며 1억원 넘는 통 큰 할인을 약속했다. 결국 미술관은 7억8750만원에 그림을 손에 넣었다.

이번 구매 일화는 여타 지역 미술계에도 시사점을 던져줄 것으로 보인다. 박수근 생가 터에 들어선 미술관이 2002년 개관할 때만 해도 컬렉션은 전무했다. 말 그대로 건물뿐이었다. 엄 관장은 "당시엔 돈 들여 작품을 산다는 의식 자체가 부족했지만 점차 변화하고 있다"면서 "작은 미술관일수록 지역 구성원들이 함께 꾸려간다는 철학이 중요하다"고 했다.





[정상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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