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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7 (금)

[김성현 기자의 그 영화 그 음악] 헨델의 아리아가 흐르자 영화는 파국으로 치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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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충' 속 바로크 음악

조선일보

"짜파구리가 뭐야?"

난리도 이런 생난리가 없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에서 사업가 박 사장(이선균)의 가족이 캠핑을 떠난 장면이다. 운전기사로 취직한 김기택(송강호)과 옛 가사도우미였던 문광(이정은)의 가족이 텅 빈 집에서 뒤엉켜 드잡이를 벌인다. 게다가 급작스럽게 쏟아진 장대비로 주인 가족은 캠핑을 취소하고 돌아오기로 한다. 집에 도착할 때까지 남은 시간은 고작 8분. 이 짧은 시간 동안 이들은 싸움을 멈추고 집 안을 깨끗이 치우고 짜파구리까지 끓여야 한다. 그것도 주인집 아들이 좋아하는 한우 채끝살까지 숭숭 썰어 넣어서.

이 장면의 코믹한 긴박감을 북돋는 것이 바로크풍의 현악 합주다. 바흐·비발디 같은 바로크 작곡가가 떠오르겠지만 속지 마실 것. 1982년생 한국 영화음악 작곡가 정재일의 솜씨다. 이 장면에서 흐르는 음악 제목도 '짜파구리'다.

조선일보

영화 ‘기생충’에서 박 사장의 운전 기사로 취직한 기택(송강호). 파국 직전의 장면에서 헨델의 오페라 아리아가 흐른다.


정재일은 초등 6학년 때부터 기타와 베이스, 키보드까지 전천후로 연주하며 가요계에 이름을 알린 무시무시한 실력파다. 중학생이 된 뒤에는 영화 '아름다운 시절'에서 피아노를, '강원도의 힘'에서 기타를, '원더풀 데이즈'에서는 관현악 작곡·편곡까지 도맡았다. 영화 '옥자'에 이어서 '기생충'에서도 음악을 맡아서 봉준호와 호흡을 맞췄다.

'짜파구리' 장면의 현악 합주처럼 이 영화에서는 바로크풍의 의고적(擬古的) 음악이 자주 흐른다. 가진 자의 위선과 못 가진 자의 사기를 모두 풍자하는 장치다. 물론 '기생충'에는 진짜 바로크 음악도 나온다. 헨델의 오페라 '로델린다'의 아리아 두 곡이다.

우선 기택의 가족이 모두 취직에 성공한 장면에서 흐르는 곡이 오페라 2막 아리아 '무정한 자여, 내 맹세를 들어주오(Spietati, io vi giurai)'다. 평온한 노래 같지만 실은 왕비 로델린다가 왕위 찬탈자를 향해 "내 아들의 목숨을 앗아갈 용기가 있다면 결혼해주겠다"고 가시 돋친 저주를 퍼붓는 내용이다. 영화에서도 기택의 가족이 박 사장 집에 무사히 '안착'한 것 같지만 언제든 깨질 수 있는 거짓 평화라는 암시다.

결국 행복했던 한낮의 파티가 핏빛 파국으로 치닫는 영화의 절정에서 또 다른 3막 아리아 '나의 사랑하는 이여(Mio caro bene)'가 나온다. 아리아는 배반과 복수를 잊고 화해와 용서의 기쁨을 노래하는 내용이다. 하지만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되는 헨델의 오페라와 달리, 봉준호의 영화는 정반대 비극으로 치닫는다. 영화에서 화려하고 우아한 바로크 음악이 들린다면, 파국이 언제든 닥칠 수 있다는 역설적 신호일 수도 있다.

[김성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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