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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02 (일)

“일제이후 잃어버린 처용의 ‘진짜 얼굴’ 찾아야죠” [차 한잔 나누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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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용탈 만들기’ 34년 김현우씨 / “처용설화 소재 시 읽고 제작 결심 / 처용 본래 모습 일제 침탈 후 변해 / 고증 통해 국내외 전시회 70여차례 / 처용무 계승위해 ‘전수관’ 꼭 필요”

그는 34년 넘게 탈을 깎았다. 목조각은 그와 아무런 인연이 없었지만 ‘처용탈’에 빠졌다. 다니던 직장까지 그만두고 발품을 팔아 이름난 장인들을 찾아다니며 혼자 조각을 연습했다. 옛 문헌을 찾고 연구하고, 논문을 쓰는 것도 그의 일이었다. 우리가 잃어버린 ‘처용의 얼굴’을 찾기 위해서였다. 신라 ‘처용설화’의 배경이 되는 처용탈을 깎아온 국내 유일 ‘처용탈장’ 김현우(65)씨 이야기다. 그를 29일 울산시 남구 달동 ‘처용탈방’에서 만났다.

3평 남짓한 김씨의 공방은 온전히 처용탈을 위한 ‘1인용 공간’이었다. 벽면에 빼곡히 걸린 다양한 크기와 모양의 처용탈이 먼저 시선을 끌었다. 처용과 관련된 책과 논문이 쌓여있었다. 1m 남짓한 길이의 탁자를 사이에 두고 그와 마주 앉았다.

“비좁지요. 허허. 그래도 혼자 쓰기엔 딱 알맞습니다.”

가장 궁금했던 것부터 물었다. 언제부터, 왜 처용의 얼굴을 깎게 됐을까.

“시를 좋아하고, 시를 쓰던 ‘문학청년’이었습니다. 울산에서 직장 생활을 하면서 우연히 신라시대 처용설화를 소재로 쓴 김춘수 시인의 ‘처용단장’을 읽은 것이 계기가 됐지요.”

문득 처용의 얼굴이 궁금해져 찾아본 것이 시작이었다. 처용탈이 일제 침탈이 노골화된 1900년대 초 사라진 뒤 30년 후 순종황제 50주년 기념식 때 일본식으로 각색돼 다시 모습을 보인 후 현재까지 내려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처용의 본얼굴을 찾아줘야겠다고 결심한 순간이었다.

“국립국악원이 소장하고 있는 처용탈은 ‘관용’이 없었습니다. ‘관용의 신’인 처용은 미소를 머금은 얼굴이어야 하는데 눈은 날카롭고, 인자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지요. 왜색 짙은 잘못된 얼굴이었던 겁니다.”

그는 처용의 얼굴이 그려져 있는 조선시대 ‘악학궤범 9권’ 사본을 구했다. ‘평안감사연희도’ ‘봉배귀사도’ ‘기사사연도’ 등 조선시대 자료를 참고했다. 목재소에 다니면서 조각 기술과 대패질을 익혔다. 말뚝이탈 등을 만들던 탈 장인들을 찾아가 묻고, 교수들을 찾아 조언을 구하고 의논했다.

“악학궤범에는 ‘피나무로 만들거나 옻칠한 삼베로 껍데기를 만들고 채색하여 양쪽 귀에는 납 구슬과 주석 고리를 건다’고 돼 있습니다. 국립국악원의 처용탈은 석고틀에 문종이를 발라서 만든 것이지요. 모양도 모양이지만 만드는 방법도 차이가 있었습니다. 문헌에 나온 그대로 처용탈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세계일보

처용탈장 김현우씨가 울산시 남구 공방에서 처용탈을 들어 보이고 있다.


김씨는 처음엔 문헌대로 피나무만으로 제작했지만, 지금은 한국에 자생하는 다양한 나무로 처용탈을 만들고 있다. 용의 얼굴로 나타났다는 ‘원초처용면’부터 신라, 고려, 조선에 이르면서 변화된 다양한 처용탈도 제작하고 있다.

“조선 성종 때는 처용탈의 턱이 짧은데, 이후 숙종 때의 ‘봉배귀사도’에선 턱이 길어집니다. 신라 인물이 조선의 사모를 쓰고 있는 것에서도 시대에 따라 변화됐음을 알 수 있지요. 이렇게 변화한 모습을 찾아 재현하는 작업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고증한 처용탈로 1995년 울산 MBC화랑 ‘학성’에서 첫 전시회를 가졌다. 처용탈을 제작하고, 전시하는 것이 알려지면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일본 나고야성 박물관(2000), 서울 남산타워박물관(2004), 울산박물관(2011), 국립해양박물관 (2012), 리투아니아 카우나스 악마박물관 (2013), 불교중앙박물관(2013) 등 최근까지 국내외에서 73차례 전시했다. 공예그룹전이나 마두희축제, 처용문화제, 중구 전통공예아트페어 등 지역축제에서도 작품을 선보인다. 오는 5월13일엔 울산남구문화원 갤리리 ‘숲’에서 전시를 한다.

김씨는 논문을 통해 처용에 대한 연구 성과를 꾸준히 발표하고 있다. 그동안 ‘처용에 관한 소고’ 등 7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신문사나 문화원지에 관련 내용을 기고하고 있다. 처용과 관련한 포럼 등에 참석해 처용탈에 대해 발표하고 논의한다. 최근엔 700쪽 분량의 책을 쓰고 있다. 처용탈과 처용설화, 또 잃어버린 처용의 얼굴을 찾기 위해 젊음을 바친 그의 인생 이야기를 담았다. 내년쯤 출간할 계획이다.

“무턱대고 만들기만 할 것이 아니라 이론이 갖춰져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학자들을 찾아가서 묻고 논의하고, 확인하고, 토론을 통해 이론적 토대를 닦았습니다.”

그의 남은 꿈은 ‘처용무 전수관’ 건립이다. 처용설화와 처용무, 처용무복, 처용탈까지 사람들이 쉽게 와서 배우고 접할 수 있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평생을 쏟아 고증한 처용탈 제작방법을 다음 세대에 물려주기 위해서라도 전수관이 꼭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겨우 제 얼굴을 찾은 ‘처용탈’이 다시 얼굴을 잃게 해선 안 됩니다. 처용의 고장인 울산이, 또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져주길 바랍니다.”

울산=글·사진 이보람 기자 boram@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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