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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8 (화)

[성제환의 메디치家 리더십] (9) 교황청 은행 따낸 조반니 디 비치…“은혜 꼭 갚는다” 축출된 교황(요한 23세)에도 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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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오모광장(Piazza del Duomo)에 가면 세례당 입구에 관광객이 몰려 있는 광경을 흔히 볼 수 있다. 미켈란젤로가 ‘천국의 문’이라고 이름 붙인 청동문을 감상하려는 관광객이다. 대부분은 이 청동문만 잠깐 보고 자리를 뜨는데 정말 아쉽다. 세례당 내부로 발길을 돌리면 오른쪽 벽면에 비싼 청동으로 장식된 대립교황 요한 23세 영묘가 있다. 이것만큼 얘깃거리가 많은 작품이 드물다.

당시 교황(마르티노 5세)은 쫓겨난 교황 요한 23세의 영묘 제작을 공개적으로 반대했다. 교황 반대에도 불구하고 메디치은행 설립자인 ‘조반니 디 비치’는 영묘 건축을 위해 무려 1000피렌체금화(플로린)를 선뜻 내놨다. 이 돈은 당시 피렌체 시내 석조 2층 건물을 살 정도의 큰 액수였다. 왜 메디치 가문은 교황 반대에도 불구하고, 큰돈을 써가며 추방당한 교황 영묘를 제작했을까? 이 수수께끼 같은 후원 배경에 메디치은행 성공 신화가 숨겨져 있다.

매경이코노미

피렌체 산조반니세례당 내부의 대립교황 요한 23세의 영묘. 세례당 관리와 장식을 책임지던 모직물 수출 무역 상인 길드(Arte di Carimala)는 “영묘가 바닥 위로 돌출되게 제작돼서는 안 된다”고 메디치 가문에 주문했다. 건축가 미켈로초는 두 기둥 사이 벽을 파서 영묘를 제작했다. 돌출물이 아니고 벽에 붙은 것이기 때문에 규정 위반이 아니다. 영묘의 세부 조각은 르네상스 조각가의 아버지로 불리는 도나텔로가 제작했다. 1420년대 후반 완성.


▶메디치 경영의 리더십

▷모험적 투자·신의로 교황청 은행 맡아

‘코시모 데 메디치’의 아버지 조반니 디 비치는 25살이 되던 해, 손위 사촌 비에리(Vieri di Cambio de' Medici)가 운영하는 로마은행(Vieri di Cambio de' Medici e compagni) 지점장 직책을 맡았다. 로마에 머무르는 12년 동안 조반니 디 비치는 서유럽 22개국에서 로마 교황청으로 헌금이라는 명목으로 엄청난 동전이 흘러들어오는 상황을 목격했다. 주홍빛 추기경 모자를 쓴 부유한 성직자들은 저축을 하고, 선물이라는 이름으로 은행 이자를 챙기고 있었다(당시만 해도 공개적으로 이자를 받는 행위는 교회법에 어긋났다). 교황청 주변에는 돈이 넘쳐났다. 조반니 디 비치는 로마에서 자본금 없이 은행을 경영할 수 있다는 점을 금세 깨달았다.

마침 건강이 악화된 사촌 비에리가 은행을 경영할 수 없게 되자 로마은행을 인수했다(1393년). 투자 재원은 부인이 가져온 결혼 지참금 1500피렌체금화였다(당시 중산층 신부 결혼 지참금이 100플로린 정도였다. 부자 가문 결혼 지참금도 1000플로린을 넘지 않았던 것을 보면 엄청난 금액이다).

신중하지만 야망이 있었던 조반니 디 비치는 통 큰 사업을 계획하고 있었다. 소소한 환전 수수료나 예대마진을 챙기는 은행이 아니라, 교황청 금고를 통째로 관리하는 은행으로 거듭나겠다는 계획이었다. 현대적인 개념으로 보면 국가 금고관리 은행이다. 조반니 디 비치의 야망과 교황좌에 앉아 교황청 권위를 부활해보려는 욕망을 지닌 발다사레 코사(Baldassare Cossa, 1370~1419년) 추기경이 뜻이 맞았다. 조반니 디 비치는 추기경이 되는 데 드는 1만듀캇(Ducat·베니스금화로 피렌체금화보다 10% 높은 가치)을 지원했을 뿐 아니라 교황으로 선출되는 데 필요한 비용을 모두 빌려줬다. 냄새나는 돈 덕분에 이 추기경은 후에 교황 요한 23세로 선출됐다.

당시 두 사람 사이에 오간 편지에 ‘amici meus carissimus(My dear Friend)’라고 서명을 한 것을 보면 친분이 두터웠던 것 같다. 교황은 조반니 디 비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메디치은행에 교황청 금고 전체를 관리할 수 있는 권한을 줬다(1410년). 이 특혜로 메디치은행은 은행 자본을 확충하는 데 필요한 자금을 쉽게 조달할 수 있게 됐다.

하지만 메디치은행의 행운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교황청 권위 부활이라는 야망을 품은 교황은 면죄부를 남발했고 돈과 여자 문제로 권위는 추락해갔다. 교황 권위를 강화하려고 소집한 콘스탄스 공의회에서 오히려 추방당하고 감옥에 갇히는 영어의 몸이 되고 만다(1414년).

조반니 디 비치는 3500플로린을 몸값으로 지불하고 감옥에 갇힌 교황을 피렌체로 데려온다. 피렌체로 돌아온 교황은 곧바로 사망한다(1419년). 이런 연유로 교황 마르티노 5세는 부패한 교황의 영묘를 성스러운 세례당에 설치하는 걸 반대했던 것. 하지만 조반니 디 비치는 친구이자 메디치은행이 서유럽에서 최대 은행으로 성장하는 과정에 핵심적인 도움을 준 교황과의 신의를 지켰다. 영묘에 ‘Ioannes quoadam Papa XXIII(한때 교황이었던 요한 23세)’라는 문구를 새겨 넣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 신의를 지키지 않았다면, 후대 교황들이 메디치에게 신뢰를 보냈을까? 메디치은행이 교황청의 금고관리를 지속적으로 했다는 사실로 답변을 갈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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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7년 메디치은행의 피렌체 본점이 입점해 있던 건물. 이 건물 1층에 푸른색 천으로 덮인 테이블(tavola) 위아래로 돈과 서류가 오갔다. Via di Porta Rossa에 위치한 흰색 건물로 현관 입구에 아직도 6개의 원으로 장식된 메디치 가문의 문장이 남아 있다.


▶메디치 경영의 리더십

▷후한 배분으로 주인의식 고취

“그 조직에 가입하면 큰 실수를 저지르는 거야. 왜냐하면 피렌체에서는 아무도 자네를 정직한 상인으로 생각지 않을 테니까. 상인으로서는 끝이야!”

1386년 26살의 조반니 디 비치가 피렌체 은행가 길드(Arte del Cambio)에 가입하자 친구들이 한 말이다. 하지만 조반니 디 비치는 로마은행에서 은행업 성장성을 간파했다. 자금 조달은 로마에서, 투자는 피렌체에서 하기로 마음을 먹고 있었다. 마침내 조반니 디 비치는 오랫동안 꿈꿔왔던 메디치은행 본점(Giovanni de' Medici e compagni)을 피렌체에 설립한다(1397년). 자본금은 8000플로린. 메디치 가문 지분이 4분의 3, 다른 가문(Bardi 가문)이 나머지를 소유한 구조였다. 메디치은행 첫해 8개월 동안 이익은 1200플로린으로 수익률이 10%가 넘었다. 당시 원금 지급이 보장되지 않은 정기예금 이자율이 7% 이하였던 상황을 감안하면 큰 수익이다. 그러나 서유럽 전역에 연결된 무역망 때문에 피렌체에 있는 메디치은행만으로 수익을 창출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해외 지점을 운영하는 은행의 국제화가 절실했다. 그러나 피렌체에서 런던까지는 90일, 베니스까지도 족히 10일이 걸렸다. 이 때문에 해외 지점 운영 상황을 직접 감독하기가 쉽지 않았다. 조반니 디 비치는 베니스 지점을 열면서 지점장(Neri Tornaquinci)에게 “해외에서 재산권을 보장해주지 않는 독일 상인에게 대출은 절대 하지 말라”고 단단히 일러뒀다. 하지만 이 지점장이 독일 상인에게 대출을 해줘 손실이 났다. 조반니 디 비치는 지점장을 해고하고, “능력보다 정직이 우선”이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이후 해외 지점장들에게 주인의식과 책임감을 심어주는 획기적인 운영 전략을 세웠다.

그 사례 하나. 메디치은행은 자본금 8000플로린을 투자해 베니스에 첫 번째 지점을 설립했다. 조반니 디 비치는 지점장에게 연봉(200플로린)뿐 아니라 투자 기회를 주는 획기적인 전략을 세웠다. 후임 지점장(Giovanni da Galiano)은 1000플로린을 투자해 9분의 1 지분을 소유했는데, 지점장에게 수익금을 25%나 분배해줬다. 이렇게 후한 배분으로 주인의식과 은행 경영의 책임감을 유도해냈다. 이 같은 경영 전략을 기반으로 메디치은행은 8개 지점과 24개 사무소를 해외에서 운영할 수 있게 된다. 지점장에게 돈을 벌 기회와 책임감을 같이 주는 메디치은행의 경영 전통은 아들 코시모에게 그대로 이어진다. 정치·경제의 영역에서 메디치 가문은 이렇게 ‘amici(친구)’를 만들어나가면서 영역을 넓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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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제환 medici60@naver.com 석좌교수·JB문화공간 대표]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 2051호 (2020.03.25~2020.03.31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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