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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9 (토)

코로나19 위기속…조명받는 '수송보국' 조중훈 리더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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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성적자 대한항공공사, 50년만 글로벌 항공사로 "위기를 기회로"

중동전쟁 위기 속 '신용' 빛 발해

아시아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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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으로 항공업계가 고사위기에 내몰린 가운데, 고(故) 조중훈 한진그룹 회장의 리더십에 항공업계의 이목이 다시 집중되고 있다. '수송보국(輸送報國)' 철학을 기반으로 수 차례 위기를 기회로 만들어 낸 조중훈 회장 처럼 대한항공 역시 국내 대표 국적항공사로 코로나19 위기를 극복, 국가에 헌신한다는 구상이다.


조중훈 회장이 한진그룹의 모태가 되는 '한진상사'를 인천에 설립한 것은 해방 직후 혼돈이 계속되던 지난 1945년 11월1일이었다. 한진은 '한민족의 전진'을 뜻한다. 당시 조중훈 회장에 수중에 있는 자산이라곤 트럭 1대 뿐이었다.


한진상사는 혼란 속에서도 빠른 성장세를 이어갔다. 사업을 시작한 지 5년만에 한진상사는 종업원 40여명, 트럭 30여대를 보유한 물류회사로 성장했다. 빠른 사세 확장의 배경으론 조중훈 회장이 강조한 '신용'이 꼽힌다. 조중훈 회장은 빌린 자금의 상환기일을 단 한 번도 어긴 적이 없을 정도로 신용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1950년 6월25일에 발발한 한국전쟁은 한진상사를 고사위기에 내몰았다. 차량과 장비는 군수물자로 징발됐고, 조중훈 회장도 3년이 지난 1953년에서야 겨우 인천에 돌아올 수 있었다. 그에게 남은 것은 쑥대밭이 된 땅과 은행 빚 뿐이었다.


◆'신용' 중시 경영 = 이런 가운데서도 조중훈 회장은 피난 때 몰고간 트럭 1대로 재기를 꿈꿨다. 전쟁 발발전 쌓아둔 신용이 무기가 됐다. 투자자들은 조중훈 회장의 신용을 바탕으로 무담보 대출을 내 줬고, 단골손님들이 몰려들면서 휴전 2년 후인 1955년 이전의 사세를 회복할 정도로 빠르게 성장가도를 달렸다.


신용은 미군과의 거래 과정에서도 빛을 발했다. 1956년 한 트럭회사로부터 임차한 차량 운전기사가 수송을 맡은 미군의 겨울옷 1300여벌을 차떼기로 시장에 팔아 치웠는데, 조중훈 회장은 당시 3만달러란 막대한 손실을 보면서도 도난당한 물건을 전부 사들이도록 했다. 이는 전화위복이 됐다. 한진은 훗날 미군 발(發) 운송권을 독점하다시피 따내 사세를 키워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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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를 기회로…영역 하늘길로 넓힌 조중훈 회장 = 승승장구 하던 한진그룹에 새로운 도전 기회가 도래한 것은 1969년이었다. 당시 박정희 전 대통령은 만성적자에 시달리던 대한항공공사 인수를 요청했다. 막대한 고정비용을 소요하는 항공사업 도전은 조중훈 회장으로서도 모험과 같았다. 조중훈 회장은 당시 "밑지면서도 계속 해야 하는 사업이 있다. 대한항공공사 인수는 국익과 공익 차원에서 생각해야 할 소명"이라면서 인수를 추진했다.


하지만 정상화 단계 초입 발발한 중동전쟁은 조중훈 회장과 대한항공을 다시 위기로 몰아넣었다. 국제유가가 치솟으면서 한 달 안에 대금을 결제하지 않으면 연료공급이 중단될 상황을 내몰렸다. 1973년에 들여온 점보기를 담보로 내놔야 할 정도로 상황은 급박하게 전개됐다.


하지만 조중훈 회장은 신뢰를 무기로 위기를 기회로 만들어냈다. 5000만달러가 필요했던 조중훈 회장은 신용을 무기로 프랑스 소시에테제너럴 은행으로부터 지불보증을 받아 위기를 극복했다. 사업 초반의 난국을 뛰어넘은 대한항공은 지난해 기준 항공기 166대, 취항도시 44개국 124개 노선, 매출액 13조원의 글로벌 항공사로 성장했다.


◆수송외길 바닷길로도 = 수송보국 철학으로 물류산업 외길을 걸었던 조중훈 회장은 이후 바닷길 개척에도 힘썼다. 1977넌엔 경영난을 겪던 대진해운을 해체하고 컨테이너선사인 한진해운을 설립했다. 당시 한진해운은 강력한 수출 드라이브로 늘어나는 해운수요를 바탕으로 매년 비약적 성장을 이어갔다.


조중훈 회장은 해운사업이 안정화되면서 조선분야로도 눈을 돌렸다. 조중훈 회장은 젊은 시절 해원양성소와 일본 조선소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 조선사업에도 애착이 깊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나 한진해운이 꾸준히 커지면서 화물선 수요가 늘었고, 보유선박의 수리물량도 적지 않아 수지를 충분히 맞출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도 한 몫 했다.


그 결과 조중훈 회장은 법정관리 절차를 밟고 있던 조선공사 매각 입찰에 참가, 인수한 후 1989년 한진중공업을 출범시키는 데 이르렀다. '육·해·공' 종합 물류기업으로서의 한진이 완성된 셈이다.


조중훈 회장은 이 와중 인재양성에도 힘썼다. 조중훈 회장은 1968년엔 인하학원을, 1979년엔 한국항공대를 인수해 시설확충과 교육의 질 개선에 집중했다. 1988년부터는 가정 형편으로 대학 진학의 기회를 갖지 못한 직원들을 위해 국내 최초의 사내 산업대학인 '한진산업대학(現 정석대학)'도 개설했다.


이밖에도 조중훈 회장은 2002년 별세하기 전까지 사재 중 약 1000억원을 공익재단과 계열사에 기부하는 한편, 이 중 500억원은 수송·물류 연구발전과 육영사업기금으로 인하학원과 정석학원, 재단법인 21세기한국연구등에 배분하기도 했다.



유제훈 기자 kalamal@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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