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5.18 (토)

노태우 정부 ‘노동탄압 국제쟁점화’ 우려, 90년 ILO 가입 보류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1989년 외교문서 공개

89년 12월 청와대·안기부 등 부처회의서 최종 결정

재외공관 총동원 가입 추진한 정부 돌연 태도 바꿔

자세히 알 수 없었던 내막, 이번에 일부 드러나

“전노협·전교조 인정할 수 없는데 ILO 문제 삼으면 곤혹”

진짜 이유 알려질까봐 ‘대외용’ 따로 만들어


한겨레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노태우 정부는 민주노총의 전신인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와 전교조를 인정하지 않고 노동탄압을 했던 실상이 국제 사회에서 쟁점화될 것을 우려해 1990년 국제노동기구(ILO) 가입을 보류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1982년부터 공식 옵서버자격으로 노사정 대표단이 참석한데다 재외공관을 총 동원해 ILO 가입에 나섰던 정부가 1990년 총회가 열리기 6개월 전에 돌연 ‘가입 보류’를 결정했던 내막은 자세히 드러나지 않았던 부분이다.

외교부는 31일 이런 내용이 포함된 30년 이상 경과한 1989년 중심의 외교문서 1577권(약 24만쪽)을 주요 내용 요약본과 함께 일반에 공개했다.

1989년 12월27일 청와대, 총리실, 안기부, 노동부, 외무부 등이 진행한 관계부처 회의 문서를 보면, 정부는 1990년 6월 예정인 ILO 총회에서 가입 추진을 보류하기로 결정했다. 총회가 열리기 직전까지 ILO 가입을 위해 득표 운동을 했던 이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유엔(UN) 회원국은 ILO 자동회원이 될 수 있으나 유엔 비회원국인 우리 정부는 ILO 총회에서 3분의 2 이상의 찬성을 얻어야 가입이 가능한 만큼, 각 국가의 지지가 중요했다. 문서에는 “최근 노사문제, 특히 전노협, 전교조, 공무원노조 결성 문제 등이 ILO에 가입할 경우 국제적으로 쟁점화되고, 이에 따라 국내적으로 부담을 가중시킬 소지가 있다”고 적혀있다. 또 “정부의 전노협, 교원노조, 공무원 노조 불허 방침 및 국내법상의 복수노조 결성 금지 규정 등이 ILO 기본정신인 결사의 자유 원칙에 위배된다”고 언급돼 있다.

한겨레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정부가 부담을 느낀 1989년은 노동운동의 격변기였다.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1989년 5월 전교조가 설립되고 정부가 불법단체로 규정하면서 전국에서 1500여명의 교사들이 대량 해고됐다. 같은해 12월 신변위협 속에 민주노총의 전신인 전노협 창립준비위원회가 만들어 지는 등 정부의 탄압에도 노동자들의 민주노조에 대한 열망은 뜨거웠다. 1989년 노조조직률은 19.8%로 역대 최고점을 찍었다.

정부의 불안은 문서 곳곳에 나타난다. 문서에는 “국내 노동단체들의 ILO 이의·진정 제기와 이에 따른 ILO의 대정부 의견제출 요구, 사실 조사단 파견, 위반사항 시정 권고 등 사태 빈발 예상된다”고 밝히고 있다. 또 “전교조, 공무원노조, 전노협 인정할 수 없는데 ILO가 이를 문제 삼을 경우 곤혹 치루게 될 것”이라며 “최근 정부의 노동운동에 대한 강경 대응 방침에 비춰 국내 노동운동에 대한 ILO 간여는 국내 정치·경제에 큰 부담 요인으로 작용할 것”이라는 우려도 담겨있다.

이번에 공개된 문서에는 각 부처 참가자들의 발언이 담긴 회의록도 첨부돼 있어 당시 정부 분위기를 더욱 생생하게 엿볼 수 있다.



노동부 노동부로서는 ILO 가입이 최대의 국제사업으로 매년 ILO 가입을 희망해온 것이 사실임. 그러나 우리나라가 ILO에 가입할 경우 국내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전노협이 ILO에 문제를 제기할 것으로 보이며, 전교조, 공무원노조 등 문제 또한 ILO에서 이슈화될 것으로 보임.

안기부 노사문제 향방 불확실한 상황에서 ILO에 가입함으로 국내 노사분규가 국제문제화 될 수도 있으므로 내년(90년)도 가입 추진 보류하는 것이 좋겠음.

총리실 ILO 가입으로 국제적 지위가 격상되는 것은 추상적인 것임. 그러나 실질적인 문제에 봉착한다면 1~2년 연기하는 것이 좋겠음.

외무부 ILO에 가입해 국내적으로 어려운 문제가 생긴다면 ILO 가입 추진 재검토해야 할 것임.

청와대 국내 노사문제가 ILO에서 새삼스럽게 거론될 가능성도 있으므로 노동부 의견대로 일단 가입 추진은 유보하는 것이 좋겠음

외무부 노사관계가 안정되면 가입 문제를 재검토해 보겠으나 이런 상황이 계속되면 내년도 가입 추진은 보류하기로 함.



정부도 ILO 가입을 보류한 진짜 이유가 알려지는 것이 부담스러웠던지 ‘대외 설명 요지’도 따로 만들었다. 그동안 한국의 ILO 가입을 지지했던 국가들에게 설명할 때 참고하라고 적혀 있다. 문서에선 “ILO 협약상 유엔 회원국이 될 경우 가입 의사 통고로만 가입이 가능함에 비춰, 현 시점에서 다대한 외교력 동원이 요구되는 ILO 가입을 서두르지 않고자 한다”고 밝혔다. 또 “ILO 가입을 반대하고 있는 북한의 적극적 방해 책동이 예상되고, ILO 가입 요건이 워낙 까다로워 ILO 가입은 여전히 용이하지 않다”고 강조했다.

우리 정부는 1965년 10월 국무회의에서 ILO 가입추진을 의결한 뒤, 꾸준히 ILO의 문을 두드렸다. 당시 유엔 16개 전문기구 중 ILO만 가입을 하지 못했던 만큼, 80년대 들어 정부는 ILO 가입에 총력을 쏟았다. 총회 직전까지 득표 운동에 적극 나섰지만 막판 표 분석을 통해 실패 가능성이 있자, 번번히 가입을 포기했다. 결국 1991년 9월 남북이 동시에 유엔에 가입하면서 같은해 12월 ILO의 152번째 회원국이 됐다. 하지만 한국은 아직도 ILO 기본협약 중 결사의 자유 협약 등을 비준하지 않고 있어 논란이 되고 있다.

한겨레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공개된 외교문서의 원문은 외교사료관(서울 서초구 남부순환로 2572)내 ‘외교문서열람실’에서 누구나 열람이 가능하다. 외교문서 공개목록과 외교사료해제집 책자는 주요 연구기관 및 도서관 등에 배포되며 외교사료관 홈페이지(http://diplomaticarchives.mofa.go.kr)와 모바일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외교부는 1994년부터 지금까지 총 27차례에 걸쳐 2만8000여권(약 391만 쪽)의 외교문서를 공개했다.

김소연 박민희 기자 dandy@hani.co.kr

▶[연속보도] n번방 성착취 파문
▶신문 구독신청▶삐딱한 뉴스 B딱

[ⓒ한겨레신문 :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