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5.05 (일)

이순신 지킨 왜구의 무덤 구국의 성지 '여수 진남관'에 무슨일이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지방관아 중 최대 규모 목조 단층건물

150억원 공사 4년간 주춧돌 70개뿐

보수 중 조선유물 5점 발견, 복원 중단

마무리 2020년서 2022년 5월로 연기

조선일보

2016년 2월 해체, 보수 사업 전 전남 여수 진남관 모습./여수시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진남관(鎭南館)은 ‘남쪽의 왜구를 진압해 나라를 평안하게 하는 집’이라는 뜻. 지난 30일 전남 여수 구도심 군자동에 자리한 ‘구국의 성지’ 진남관은 4층 건물 높이 가설덧집이 성처럼 감싸고 있었다. 문화재청과 여수시가 150억원을 들여 2016년 2월 진남관 전면 해체·보수 사업을 시작하면서 가림막용 가건물을 세웠다. 목재 기둥이 부식되는 등 건물 노후화가 심각해 해체·보수 작업에 나선 것이다.

진남관은 조선시대 대표 건물. 현존하는 지방 관아 중 최대 규모 목조(木造) 단층 건물이다. 748㎡(240평) 터에 있는 진남관 건물을 포함해 일대 7317㎡(2214평)를 공사용 가건물이 완전히 둘러싸고 있다. 밖에선 진남관이 보이지 않는다.

덧집 안 진남관 터를 지키는 것은 건물의 기둥을 떠받치던 주춧돌 70개였다. 당초 68개로 알려진 초석(礎石)은 2개가 더 발견돼 70개로 늘었다고 한다. 2018년 9월 68개의 기둥과 팔작지붕 등을 모두 해체했다. 건물이 사라지고 이제 기둥 밑에 괴는 돌만 남은 것이다. 1953년 보수공사 도중 1718년 전라좌수사 이제면(李濟冕)이 쓴 중건기(重建記)와 현판이 발견됐다. 그전에 불에 탔던 진남관을 이제면이 1718년 복원했다는 것이 정설. 지금의 진남관은 302년이 됐다.

‘302살 진남관’은 당초 올해 완전히 복원돼 외부에 공개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착공 4년이 되도록 진남관 부지에는 건물의 기초가 되는 모퉁잇돌밖에 없다. 문화재청은 중건(重建) 공사에 신중하다. 진남관을 해체하면서 터에서 300년 된 조선시대 유물 5점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지난해 2월 공사를 전면중단했다. 가설덧집을 만들고 본격 복원공사를 시작한 지 2년 만이었다.

조선일보

전남 여수 진남관을 감싸고 있는 가설덧집 조감도./여수시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현재 조사·발굴 용역을 반영한 설계 작업이 한창이다. 내달 문화재위원회 회의에서 공사 재개 여부가 결정된다. 사업비는 150억원에서 더 추가될 전망이다. 여수시는 “문화재위 승인을 받아 5월부터 복원 공사에 속도를 내도 완성에는 2년이 더 걸린다”고 말했다. 복원하고 보수한 진남관 공개 시점이 이르면 2022년 5월이 될 예정이다. 하지만 고증 연구와 발굴을 병행하고 있어 완공에 수년이 더 걸릴 수도 있다.

국보 제304호 진남관은 정면 15칸, 측면 5칸 단층 팔작지붕으로 된 목조 건물이다. 전라좌수영 내 관아 중 객사(客舍)였다. 객사는 왕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모시고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대궐을 향해 예를 올리는 장소. 사신이나 관리들의 숙소 등으로 사용된 건물이기도 하다. 전패는 왕의 초상을 대신해 봉안하던 목패다.

진남관은 1598년(선조31) 12월 통제사겸 전라좌수사로 부임한 이시언(李時言)이 1599년 정유재란으로 불탄 전라좌수영 진해루터에 객사로 지은 건물이다. 이후 1716년 소실돼 1718년(숙종 44) 전라좌수사 이제면이 중건했다. 앞서 이순신 장군은 임진왜란 당시 진남관이 있던 전라좌수영에서 진두지휘해 왜군에게 철퇴를 가했다.

군사적 기능을 다한 진남관은 1910년 여수 공립고등보통학교를 시작으로 일제 강점기에는 여수중학교, 야간상업중학교로 사용됐다. 해방 후 여러 차례 보수를 거쳐 지금의 모습을 유지해왔다. 남향의 진남관에선 한때 왜구를 물리쳤던 여수의 남쪽 바다를 굽어볼 수 있다.

[조홍복 기자]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