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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8 (토)

열여덟살 소녀의 씩씩한 홀로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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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내게는 홍시뿐이야

김설원 지음/창비·1만3000원

김설원(사진)의 소설 <내게는 홍시뿐이야>는 가족의 붕괴에서부터 출발한다. 어머니와 단둘이 살던 열여덟살 ‘아란’이 어머니와 헤어지고, 어머니에게 진 채무를 변제할 겸 아란을 맡았던 ‘또와 아저씨’네 집 식구들도 뿔뿔이 흩어지게 되면서 결국 혼자 남는 상황으로 소설은 문을 연다. 어머니와 아란이 살던 임대아파트는 계약기간이 만료되는 바람에 갈 곳 없어진 모녀가 각자 도생을 택해야 했고, 다니던 회사에서 밀려난 뒤 “또와아귀찜, 또와막창구이, 또와해장국, 또와김밥…” 등을 운영하던 또와 아저씨는 빚만 진 채 살던 집마저 남에게 넘겨야 할 처지가 되었다.

어머니와는 연락이 끊기고 학교도 자퇴한 뒤 치킨집 아르바이트를 하며 홀로 서게 된 미성년자 아란의 삶을 그림에도 그 어조가 사뭇 담담하고 씩씩하다는 점이 이 소설의 매력이다. 다행히 값싼 셋방을 얻었고 일자리도 생겨서 당장 먹고 사는 데에는 지장이 없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유일한 가족이었던 어머니와 이별하고 학업마저 중단하게 되었음에도 좌절하거나 분노하는 대신 차분하게 삶의 다음 단계를 찾아 나가는 아란의 실질주의적 성격 역시 소설을 비극이나 신파로 떨어지지 않도록 한다. “언제부턴가 내 안에서 일렁이는 ‘될 대로 되라’는 붉은 기운, 그 생소한 불꽃은 나의 유일한 무기였다.”

아란이 일하게 된 치킨집 주인인 사십대 중반 여성 ‘치킨홍’ 역시 소설의 밝고 긍정적인 분위기에 기여한다. 아란이 차차 알게 되거니와, 치킨홍은 아버지와 새어머니 사이에서 난 지적 장애 남동생 ‘양보’를 데리고 있는데다 나중에는 외삼촌이 베트남 여성과 결혼해 낳은 어린 사촌 ‘첸’까지 챙겨야 하게 된다. “양보와 나도 반반 섞인 관계, 첸이와 나도 반반. 반반끼리 모여 살아보지, 뭐. 치킨도 후라이드 반 양념 반이 맛있잖아.”

치킨홍의 너른 오지랖은 종내에는 아란까지도 가족처럼 품기에 이르고, 아란과 치킨홍과 양보와 첸은 일종의 유사가족 또는 대안가족을 이루게 된다. 그럼에도 엄마를 향한 그리움을 아란이 아주 잊은 것은 아니어서, 그 그리움은 엄마가 그토록 좋아했던 홍시를 사서 모으는 행위로 표현되고는 한다. “나에게는 홍시가 엄마의 얼굴이고, 목소리이고, 웃음이니까.” 치킨홍의 오지랖만으로는 아쉽고 불안하다 싶을 때 아란은 방 안 소쿠리에 한가득 담겨 달큰한 냄새를 풍기는 홍시들을 보며 생각한다. “내게는 홍시뿐이야.” 제12회 창비장편소설상 수상작이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사진 창비 제공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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