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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8 (토)

[ESC] 1년 동안 준비한 이야기가 날아갔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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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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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보통의 해 봤습니다]

모르는 분이 많겠지만, 저의 본업은 만화가입니다. 어쩌다 보니 이래저래 다른 일을 많이 하고 있어 은퇴했냐는 얘기를 종종 듣기도 하지만, 아직 살아야 할 날은 긴데 벌어둔 돈은 없어 슬슬 새 연재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원래 시놉시스나 콘티를 만들어놓고 연재를 하는 성격이 아닌데 이번엔 좀 잘해서 은퇴하고 싶다는 마음에 꾸역꾸역 시놉시스를 만들고 콘티를 짜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1년이 지난 올해 초, 이제 어느 정도 준비가 됐다 싶던 때 전혀 예측하지 못한 상황이 발생해 연재를 미루게 됐습니다. 정체불명의 바이러스로 인해 인류가 멸망한다는 이야기를 준비한 참이었는데 때마침 코로나19 사태가 터졌기 때문입니다. 뭐, 시류에 편승해 더 인기를 끌 수도 있겠지만 제가 연재를 망설이게 된 이유는 단지 소재가 겹친다는 것만은 아닙니다.

어린 시절부터 저는 인류 멸망에 대해 상상하는 것을 즐겼습니다. 이 지구라는 별에 인간이라는 단일종이 이렇게나 많이 번성하고 그렇게 많은 인간이 다른 종을 재배, 사육, 도살, 섭취, 파괴하는 것이 정상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전 지구적인 관점에서 봤을 때 인간은 없는 편이 더 나은 것이 아닌가 하고 진지하게 고민할 정도였습니다. 그렇다면 인류는 어떻게 멸망하게 될 것인가. 영화 <혹성탈출>처럼 지성을 가진 다른 종에 의해 만물의 영장 지위를 박탈당하게 될까? 소설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에서처럼 다른 외계인에 의해 한순간에 파괴될까? 그도 아니면 <매트릭스>처럼 가상현실에 갇힌 채 기계에 이용당하는 생체 건전지가 될까? 흥미로운 방법들이기는 하나 현실적인 것이 없어 만족스럽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제가 생각해낸 답은 ‘서로를 미워하여 분열하고, 고립된 채 자멸한다’이었습니다.

제가 준비하던 만화 속 인물들은 어느 날 닥쳐온 바이러스로 인해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공포에 빠집니다. 증상이 즉시 눈으로 알아볼 수 없기에 누가 보균자인지 알 수 없어 서로를 믿지 못합니다. 그 와중에 공동체는 해체되고, 개인은 파편화되어 갑니다. 바이러스의 원인을 이성적으로 찾기보단 평소 자신들이 미워하던 것들을 그 원인으로 지목하여 증오를 드러낼 수단으로 사용합니다. 결국 세상은 오로지 서로를 미워하는 사람들로만 가득 찬 채 가장 약하고 소외된 사람들부터 하나둘 죽어가기 시작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무렵 바이러스는 이미 사멸한 상태이나 사람들은 여전히 서로를 미워하고, 그렇게 인류는 멸망으로 향합니다. 저는 인간의 행태를 봤을 때 이게 가장 인간다운 멸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코로나19 사태가 벌어지고 예상과 어긋난 모습을 보게 됐습니다. 전문가들은 이 사태의 원인을 밝혀내고 대응하기 위해 사력을 다했습니다. 그동안에도 각자의 자리를 지킨 채 맡은 바 임무를 다하는 구성원들로 인해 사회는 멈추지 않고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개개인들은 공포에 질려 자신의 안위만을 좇는 대신 정부를 믿고 따르며 일상을 이어나가고 있었습니다. 물론 돌발적인 사람과 조직이 튀어나와 모두를 당황케 하여 ‘예상대로 멸망을 향해 돌진하는가’ 싶은 때도 있었지만, 대체로는 예상과는 다르게 마무리되었습니다.

그것이 연재를 미루게 된 이유입니다. 이런 와중에 사람들이 서로를 미워하다 멸망한다는 만화를 그려봤자 ‘무슨 이런 말 같지도 않은 얘기를 하고 있어’라며 거들떠보지도 않을 테니까요. 열심히 준비한 만화가 날아가게 생겨 아쉬운 일이지만 앞으로의 사태가 잘 마무리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그러니 인간 여러분. 모두 조금만 더 힘을 냅시다.

글·그림 김보통(만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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