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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8 (토)

[ESC] 촬영장 갑질 스타는 이제 진짜 스타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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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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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강남구 청담동 혹은 논현동 조용한 주택단지 인근 상가 건물의 지하. 패션 매거진에 실을 화보를 촬영하는 사진 스튜디오는 보통 그런 곳에 있다. 층고가 적어도 4~5m 되어 보이는 흔치 않은 거대한 공간에 흰색으로 칠한 벽을 가운데 두고 탈의실, 메이크업 룸, 의상실, 스튜디오 스태프들의 작업실이 포진해 있는 복층 구조가 많다. 연예인이 화보의 주인공인 날이면 도합 약 스무명가량의 인원이 복작복작 모인다. 그 연예인의 매니지먼트 팀과 홍보팀에 해당 잡지의 패션 에디터 혹은 피처 에디터가 섭외한 스타일링 팀, 헤어와 메이크업 팀, 촬영 팀까지 더해지는 것이다.

대략 5년 전쯤 패션 잡지에서 피처 에디터로 일할 때 화보 촬영은 내게 스트레스였다. 모두가 그런 건 아니지만, 어시스턴트들에게 소리치고 욕을 하며 촬영 현장을 지휘하는 사진가나 스타일리스트가 많았기 때문이다. 특히 단체 촬영이 있는 날이면, 여기저기서 욕설이 난무하는 통에 현장이 그야말로 난장판이 되기도 했다.

그런 난장판에서는 스타 대접이 중요했다. 촬영 실장이 조명 세팅을 마치고 나면 머리를 손질하고 화장을 완벽하게 한 스타가 탈의실에서 나와 세팅한 촬영 위치에 섰다. 이 모든 걸 조율한 패션 에디터는 이때부터 비주얼 디렉터에서 물개로 바뀐다. 촬영 실장이 찰칵하고 첫 컷을 촬영한 후, 연예인 사진이 바로 컴퓨터 모니터에 뜨는 순간 최대한 목청을 열어 “대박!”이라고 크게 소리를 치고 물개 박수를 쳤다. “어머 진짜 너무 멋지다”라며 연예인의 이름을 연호했다. 이게 내가 약 십년 전부터 경험했던 촬영장의 풍경이고, 촬영장을 조율하던 에디터의 역할이었다. 간혹 에디터가 기분을 잘 맞춰주지 못하면 마음 상한 스타가 매니저에게 성화를 부리며 촬영을 안 하겠다며 펑크를 내는 일도 있었다.

요새는 아니다. 5년여를 디지털 매체에서 일하다가 패션 매거진으로 돌아와 보니, 촬영장의 분위기가 전과 달랐다. 스태프가 복작복작한 건 마찬가지였고, 서로 누군지도 잘 모르고 일하는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소리를 치는 사람은 없었다. 일은 수월하게 돌아갔다. 각자가 해야 하는 일을 정확하게 알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젊은 스타들이 촬영장에 나타날 때의 분위기는 과거와 많이 달랐다. 얼마 전 촬영장에서 만난 한 래퍼는 들어서자마자 모든 촬영장 스태프들에게 악수를 하며 인사를 했다. 매니저가 친구처럼 인터뷰 중간에 농담을 하며 끼어들기도 했다. 예전 같으면 “감히”란 말이 나올 정도로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또 다른 가수는 농담을 던져가며 귀여운 포즈를 취해 오히려 촬영장의 분위기를 띄웠다. 특히 매니저를 대하는 태도가 달랐다. 예전의 연예인들이 자신의 로드 매니저를 시종 부리듯 했다면, 지금 스타들은 친구를 대하듯, 직장 동료를 대하듯 한다. 물론 지금도 그렇지 않은 경우들이 있을 것이다. 세상 모든 게 ‘케이스 바이 케이스’라고 한다면 할 말은 없지만, 적어도 내 눈엔 변한 게 보였다.

최근 우리 잡지 스태프들과 해외 촬영을 마치고 온 최정상급 아이돌이 있다. 그와 해외 촬영을 한 팀원들에게 그에 대해 물었더니 “정말 착하고 예의 바르다”라고 입을 모아 말했다. 그 아이돌과 서울 모처에서 만나 대화를 나누다 “(당신의) 춤 실력이 늘었다”고 말했더니 그는 “제가 잘해야 하는 일이 춤”이라고 답했다. 그는 또 팬들이 쓴 글을 읽으며 “팬들이 원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고, 팬들에게만은 완벽한 모습을 보여주려 노력한다”고도 말했다. 젊은 연예인들의 직업관이 좀 더 상식적인 세계를 만드는 데 일조하는 건 아닐까? 그와 화보를 촬영한 스태프들은 일하는 내내 마음이 편했을 것임은 자명한 일이다. 그에게 화보 촬영은 일이고, 자기 일이 잘 되려면 그 일을 도와주는 사람들의 기분을 상하게 할 필요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는 톱스타인데도 인터뷰하는 내내 생글생글 웃고 농담을 던지며 오히려 내 기분을 북돋워 줬다. 그래서일까? 그의 일이고 나의 일이기도 한 그 날의 인터뷰는 더할 나위 없이 즐거운 기사로 탈바꿈했다.

오래전에는 통제가 안 되고 제멋대로 구는 스타들이 대접을 받았다. 어시스턴트들에게 욕지거리하는 20대 사진가가 ‘에지 있다’라며 칭송받던 시대가 있었다. 팀원들을 마구 몰아붙이던 스타일리스트가 ‘카리스마 넘친다’는 말로 포장되어 잘 팔리던 때가 있었다. 한 편집장 선배에게 이런 변화에 대해 그 이유를 물었다. 그는 “요새 어시스턴트들은 윽박지른다고 컨트롤할 수 있는 세대가 아니다. 요새 진짜 실력으로 인정받은 젊은 스타일리스트나 사진가들은 온건한 성향이 많은데, 그것도 한 이유”라며 “특히 경쟁이 심한 기획사 시스템에서 제대로 교육받고 자란 아티스트들은 일을 대하는 의식 수준이 예전에 견줘 한참 높아졌다”고 말했다. 시대는 정상으로 돌아왔고, 이제 더는 그런 살얼음판 같은 분위기를 만드는 기술이 실력으로 여겨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무척 기뻤다.

박세회(<에스콰이어> 피처 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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