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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2 (일)

바이러스 걱정 없이 낚시로 대출금 갚는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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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최태섭의 어른의 게임

19. 인간 세계 밖 ‘모여봐요 동물의 숲’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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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닌텐도스위치의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다. 정가는 36만원이지만 이 가격으로는 중고품도 구하기 어렵다. 신품의 경우 최저가가 50만원 수준이다. 일찌감치 품귀 현상이 나타났던 피트니스 게임인 링피트(정가 8만4800원)가 동봉되면 가격은 순식간에 뛰어오른다. 원인은 코로나19로 인해 집에 있는 시간이 늘어난 사람들의 수요 폭증, 그리고 마찬가지 이유로 차질이 빚어진 중국 공장의 생산 공정 때문에 줄어든 공급 물량이다. 여기에 경쟁자라고 할 수 있는 소니의 플레이스테이션4와 마이크로소프트의 엑스박스원이 모두 연내 차세대 게임기 발매를 예고하는 상황이라 쉽사리 손이 가지 않는다는 것도 한몫하고 있다.

닌텐도의 게임기들은 경쟁사의 게임기들에 비해서 성능이 뒤처지곤 했다. 그래서 닌텐도는 터치스크린, 모션센서 같은 새로운 기능을 게임기에 추가하는 한편, 오로지 자사의 게임기로만 할 수 있는 자체 제작 게임들을 통해 이 상황에 대응했다. 게임기가 한두 푼도 아니고 게임 하나 하려고 게임기를 살 수 있을까? 하지만 그게 슈퍼마리오, 젤다의 전설, 포켓몬스터, 동물의 숲이라면 어떨까?

이 아이피(IP)들은 오랜 역사와 인지도, 엄청난 팬층을 확보하고 있는 닌텐도의 주력 상품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매 시리즈가 발매될 때마다 닌텐도 역시 영혼을 갈아 넣어 제작에 임하고, 거의 대부분의 게임들이 좋은 평가를 받아왔다. 그리고 얼마 전 출시된 ‘모여봐요 동물의 숲’ 역시 시리즈 최고의 게임성을 갖추었다는 평가를 받으면서 역대 최고의 초기 판매량을 올리고 있다.

동물의 숲을 가장 잘 표현하는 한 단어는 ‘신선놀음’이다. 게임을 시작하면 게임 안에서 나를 대신할 캐릭터를 만들고, 숲과 개울과 바다가 있는 마을에서 살기 시작한다. 이 게임은 특별한 목표나 끝판왕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플레이어는 낚시를 하고, 곤충을 채집하고, 꽃과 나무를 심고, 집과 마을을 가꾸면서 시간을 보내게 된다. 게임의 시간은 현실의 시간과 연동되며, 계절마다 다른 모습을 볼 수 있다. 이 모든 것을 혼자서 외롭게 한다면 그냥 ‘사이버 월든’이 될 뿐이지만, 동물의 숲인 만큼 동물 친구들이 함께한다. 생김새도 성격도 다른 수많은 동물 친구들은 처음에는 서먹하게 굴다가도, 친해지고 나면 귀찮아질 정도로 아는 체를 하고, 노래를 불러주며, 선물과 편지를 주고받는 사이가 된다.

동물의 숲속에서 나는 먹고 마실 필요도, 이런저런 세파에 시달릴 필요도, 바이러스를 걱정할 필요도 없다. 물론 숲속에 있는 내 작은 집을 위해 대출을 받아야 하지만, 이자도 없고 독촉도 없다. 돈은 낚은 물고기나 곤충, 나무에서 딴 과일 혹은 이러저러하게 얻은 물건들을 팔아서 번다. 현실에서 낚시를 해서 집을 사겠다는 꿈을 꾸는 사람이 있다면 정신을 차리라며 뒤통수를 후려갈길 테지만, 게임에서는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격렬한 액션도, 감동적인 서사도, 숙련의 기쁨도 없어 보이는 이런 게임이 과연 재미있을까? 자세히 게임을 뜯어보면 나름 액션과 서사와 숙련이 소소하게 흩뿌려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거대한 목표를 내세우는 것은 아니지만 작은 도전들이 게이머에게 주어지고, 게이머는 내가 행한 일들이 숲속에 변화를 일으키는 것을 볼 수 있게 된다. 그중 어떤 것들은 반드시 긴 시간을 들여야지만 성취가 가능하다. 가령 마을의 박물관은 게임 내에 존재하는 모든 물고기, 화석, 곤충 등을 기증하여 채워야 하는데, 계절에 따라 등장하는 것들이 달라지기 때문에 최소한 1년 가까이 플레이해야 박물관을 꽉 채울 수 있다. 또 아주 희박한 확률로 등장하는 것들이 있기 때문에 1년을 한다고 해서 반드시 모든 걸 수집할 수 있으리란 보장은 없다.

물론 박물관을 꽉 채우지 않는다고 그 누구도 뭐라고 하지는 않는다. 그냥 빈곳을 바라보며 전의를 다지는 자신과의 싸움이 있을 뿐이다. 영원히 끝나지 않는 방학 같은 삶을 살 수 있건만, 최고의 효율과 최단 루트를 사랑하는 한국의 게이머들을 막지는 못했다. 빠르게 돈 벌고, 빠르게 채집하고, 빠르게 대출금을 갚는 팁들이 벌써 넘쳐난다. 대출 없는 내 집 마련을 향한 한국인들의 갈망 때문은 아닐까.

사회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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