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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02 (일)

[권석천의 시시각각] 호기심 천국 / 농담 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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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친 없어?” “여기는 꽃밭”

몹쓸 호기심과 못된 성희롱

‘n번방’이 따라한 것 아닌가

중앙일보

권석천 논설위원


“호기심 등에 의해 이 방에 들어왔는데 막상 보니까 적절치 않다 싶어서….”

지난주 텔레그램 집단 성 착취 사건에 대한 황교안 미래통합당 대표 발언을 놓고 논란이 일었다. 그런데 사람마다 접근하는 포인트가 달랐다. “그걸 왜 말로 하지? 머릿속으로 하면 되는데.” “정치인 되긴 멀었어. 아직도 자기가 법조인인 줄….” 그렇다면 생각은 해도 되고, 법조인은 그래도 되는 걸까.

자, 이제 호기심이란 단어에 호기심을 가져 보자. ‘새롭고 신기한 것을 좋아하는 마음’. 어린 시절 계란을 품었던 발명왕 에디슨을 떠올려 보라. 호기심은 나쁜 게 아니다. 문제는 호기심이 맹랑하게 선(線)을 넘을 때다.

“아버님은 뭐 하시노?” “남자친구 없어? 외롭겠다.” “결혼은 언제 하려고?” “남편하고 잘 지내는 거지?” “좀 야윈 것 같은데 집에 무슨 일이….”

그렇지. “어머님이 누구니?”도 있다. 지겹지도 않은가. 일하려고 직장을 다니는 건데, 왜 그리도 남의 사생활을 기웃거리는 것인가. 당신은 “따뜻한 관심”이라고 주장하겠지만, 상대방은 그저 불편하고 불쾌한 간섭일 뿐이다.

이유는 호기심에 눈이 달렸기 때문이다. 호기심은 교활하게 사람을 가린다. 생각해 보자. 당신 상사의 부모나 연인, 부부관계를 알고 싶어 궁금증을 입 밖에 낸 적이 있는가. “사모님하고는 잘 지내시는 거죠?”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하다면 한번 해 보시라. 그게 아니고 자식 같아서 자꾸 관심이 간다고? 그 관심, 제발 당신 자녀에게 쏟아라.

한국 사회에서 어느 정도 지위에 오른 이들에게 직장은 ‘호기심 천국’이다. 두 눈을 반짝이며 무궁무진한 앎의 욕망을 마음껏 풀 수 있는 놀이터다. 맞은편에 선 이들은 그 호기심에 쩔쩔매고 밥맛을 잃는다. 손목을 뒤로 꺾인 듯이, 쭈뼛대는 억지 미소로, 그 호기심에 응답하는 시늉을 한다. “예? 그게….”

그 순간 그들은 영화 ‘달콤한 인생’의 보스 김영철이 이병헌에게 뱉었던 대사를 패러디해 드리고 싶을 것이다. “넌 나에게 목욕가운(모욕감)을 줬어.”

기대하시라. 우리의 간부님들에겐 놀이동산이 하나 더 준비돼 있다. 회식 자리다. 그들에게 회식은 ‘소통이 꽃피는 나무’다. 직원들에겐? 화염지옥이다. 지난해 여성가족부가 발표한 실태 조사 결과에 따르면 성희롱이 발생한 곳은 회식 장소(43.7%)가 가장 많았고, 사무실(36.8%)이 그 다음이었다.

“여기는 꽃밭이네.” “예쁘면 공부 못해도 돼.” “가슴이 아스팔트네.” “그렇게 딱 붙는 거 입고 다녀.”(여성가족부 온라인 국민참여행사)

성희롱 피해자 81.6%는 ‘참고 넘어갔다’. 왜? 문제를 제기해도 ‘농담’이란 이름의 철벽에 튕겨 나오니까. “그거 다 웃자고 한 소리야.” “친근해서 한 얘긴데 무슨….” 심지어 유별난 사람 취급한다. “성격 참 예민하네!” 아, 회식이 문제라고? 당신이 문제다. 요즘은 코로나19로 재택근무를 해서 낫겠다고? 이상야릇한 게시물이 수시로 올라오는 단톡방(단체 대화방)의 카톡 소리에서 자유로운 곳은 지구 위 어디에도 없다.

‘예수 천국 / 불신 지옥’이 아니라 ‘호기심 천국 / 농담 지옥’이다. 2018년 JTBC 드라마 ‘미스 함무라비’엔 직장 내 성희롱 사건 재판 과정이 그려졌다. “사회가 변한 걸 미처 따라잡지 못한 사람들….” 법원 구내식당에서 부장판사(성동일)가 혀를 끌끌 차자 배석판사(고아라)가 그렇다면 그런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해야 하느냐고 묻는다.

“어머 아저씨, 아저씨 잘못 아니에요! 언젠가는 따라잡으시겠죠. 근데 이번 생에 가능하시겠어요?”

그러게. 이번 생에 가능할까. 따라잡진 못하더라도 따라잡으려고 노력은 해야 하지 않을까. 인격을 살인한 ‘n번방 품평회’도 어른들의 몹쓸 호기심과 성희롱을 등 너머로 배운 것 아닌가. 아니면 누구한테 배웠겠는가. 잔인한 달 4월에, 저 자신과 제 연배의 아저씨들 모두에게 던지는 물음이다.

권석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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