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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9 (일)

[일사일언] 스잔 對 경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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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이규탁 한국조지메이슨대 교수


1980년대 인기 가수 김승진이 최근 출연한 TV 프로그램을 우연히 보게 됐다. 김승진은 고교생이던 1985년 데뷔 앨범 '스잔'이 히트하면서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하이틴 스타들의 원조였다. 비슷한 시기에 등장해서 역시 여성 이름을 제목으로 붙인 '경아'라는 노래로 사랑받았던 가수 박혜성과 라이벌 구도를 이루기도 했다.

사춘기 무렵이었던 나는 FM 라디오를 들으면서 좋아하는 가수의 노래를 신청하고, 사연과 함께 신청곡이 나오길 기다리는 것이 일과였다. 가요 순위 프로그램에 출연한 가수들의 무대를 보면서 환호했고, 용돈을 모아 카세트테이프를 사기도 했다. 요즘 말로 '팬심'을 보인 셈이다.

하지만 김승진이나 박혜성은 대단한 인기 가수였다는 사실 외에는 특별히 기억에 남아 있지 않았다. 평소에 그들의 노래를 찾아 듣거나 불러본 적도 없고, 방송을 보기 전까지는 이들에 대해 생각해본 적도 거의 없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TV에서 김승진이 '스잔'을 열창하기 시작하자 가사 하나 안 틀리고 너무나도 완벽하게 따라 부르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딱히 좋아하던 노래도 아닌데 어떻게 단번에 기억이 났는지 스스로가 대견할 지경이었다.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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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시간이 흐를수록 기억이 지워지고 그 위에 컴퓨터 하드디스크처럼 새로운 경험과 기억을 덧씌운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우리 뇌에는 '블랙박스' 같은 것이 존재해서 예전 기억을 자동 삭제하는 대신, 그곳으로 옮겨서 압축한 뒤 차곡차곡 저장하는 건 아닐까? 평소엔 꺼내서 볼 일이 없지만, 특별한 계기가 생기면 그 안에 깊숙이 저장된 기억을 다시 불러내는 것일지도 모른다. 김승진의 '스잔'도 내 머릿속 블랙박스에 저장돼 있던 정보였을 것이다. 소환된 노래는 그 곡을 자주 들었던 시절의 감정과 분위기, 배경도 불러낸다. 내가 '스잔'을 부르면서 어릴 적 살았던 집과 조그만 컬러 TV를 함께 떠올리는 것처럼 말이다. 아마도 그걸 추억이라고 부르는 것 같다.



[이규탁 한국조지메이슨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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