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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9 (일)

[만물상] “제발 오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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낚시꾼들 사이에선 올봄 기대되는 낚시 명소가 있었다. 지난달 전남 여수와 고흥 사이 섬들을 잇는 다리가 8년 만에 완공돼, 주꾸미와 볼락 낚시로 이름난 섬 낭도 가기가 한층 수월해졌기 때문이다. 역시나 길이 열리자 이 섬에 주말 하루 1000명씩 나들이객이 몰리고 있다. 그러자 노인이 대부분인 주민 150여 명은 코로나 바이러스 유입을 걱정하며 “제발 오지 말아 달라”고 호소하고 있다. 뚫린 길을 막을 수는 없어 “마을에만은 들어오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고 있다고 한다.

▶광양 매화 축제, 진해 군항제, 여의도 벚꽃 축제 같은 유명 축제들이 모조리 취소됐는데도 사람들이 밀려들자 지자체들은 산책로와 주차장을 아예 폐쇄했다. '어서 오십시오' 팻말이 있던 곳엔 열화상 카메라와 방역차를 세워 놓았다. 창원 시내엔 '상춘객 여러분의 방문 자제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라는 현수막이 나붙었다. 지난 주말 여의도에 벚꽃 구경을 간 사람들은 국회의사당 뒷길이 폐쇄되자 63빌딩 쪽 인도로 몰려들었다고 한다.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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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현상은 일본도 예외가 아니다. 오키나와현 이시가키섬엔 최근 '남쪽 섬은 안전하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예년보다 더 많은 여행객이 몰렸다. 섬 당국은 지난주 기자회견을 열어 "우리 섬을 찾아 주는 건 감사한 일이지만 지금은 '국난 상황'이니 방문을 자제해 달라"고 호소했다. 이 섬엔 병상이 3개밖에 없다고 한다.

▶엊그제 신문에 강원 삼척에서 유채꽃밭을 갈아엎는 사진이 실렸다. 삼척시는 옛 7번 국도변에 축구장 여덟 배만 한 유채꽃밭을 만들어 매년 이맘때 관광객을 모아 왔다. 올해 축제를 취소했는데도 외지인 발길이 이어지자 꽃이 더 예뻐질까 봐 서둘러 트랙터로 1만6000평 꽃밭을 갈아엎었다. 서울 북촌 한옥마을, 부산 감천 문화마을 같은 곳에서 관광객 소음과 쓰레기로 몸살을 앓는 '오버 투어리즘'이 문제가 된 적은 있으나 거의 모든 지자체가 '제발 아무도 오지 말아 달라'고 읍소하는 장면은 코로나 바이러스가 만들어 낸 또 다른 풍경이다.

▶이탈리아 베네치아는 주민 5만5000명에 연 관광객 3000만명이 붐비는 도시다. 지금 한창 꽃이 피어 손님 맞을 때인데 텅 빈 유령도시가 됐다. 아무도 가지 않고 아무도 오라고 하지 않는다. 집에 갇혀 지내 답답한 건 지금 전 세계가 함께 겪는 고충이다. 우르르 몰려다니기만 해도 폐를 끼치니 동네에 핀 꽃 구경으로 만족해야겠다. 그나저나 이번 봄엔 어쩌자고 꽃이 더 일찍 더 예쁘게 피었나. 너무 예쁜 죄로 트랙터 칼날에 참수된 꽃들에 조의(弔意).

[한현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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