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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9 (수)

[이순원의 마음산책] 우리 농촌 문화유산 답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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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바이러스 때문에 다들 힘들어 하고 있다. 나도 지난 1월 이곳 춘천에 김유정문학촌 촌장으로 부임하자마자 문학관 관리와 운영보다 힘들게 겪고 있는 일이 바로 코로나19 바이러스에 대한 대처이다. 다중 이용시설이라 어느 곳보다 조심하지 않을 수 없다.

지난해에 김유정문학촌을 다녀간 관람객이 100만 명 가까이 되다 보니 사람 많이 가는 곳과 모이는 곳일수록 더 조심해야 한다. 외부와 개방된 문학관 공원지역이야 사람의 발길을 억지로 막을 수 없지만, 전시실 등의 시설 공간은 당분간 폐쇄하고 있다. 그러면서 자연히 문학촌 안의 책방에 보관되어 있는 책들과 친하게 지내게 되었다. 그 중에 최근 재미있게, 또 의미 있게 읽은 책이 농민신문에 근무하는 기자가 오랜 기간 발품을 팔아서 쓴 <농촌문화유산답사기>였다.

김유정 선생은 1930년대 한국 농촌을 배경으로 쓴 작품이 많다. 그때로부터 지금까지 80년의 시간이 흘렀다. 그런데도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것이 바로 농사를 귀하게 여기는 우리 마음 안의 농본주의 문화가 아닌가 싶다. 벼의 품종도 달라지고, 농사를 짓는 방법도 소와 사람 손에 의지하던 시절로부터 기계에 모든 것을 다 맡기는 시대로 바뀌었다 해도 쌀 한 톨, 수수 한 톨 귀하게 여기는 마음만은 그대로다.

내게 <농촌문화유산답사기>가 더 반갑고 가깝게 느껴지는 것은 나 자신이 어린 시절 농촌에서 자랐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 책에 나오는 ‘청산도 구들장논’이나 ‘남해 가천다랭이마을’의 층층을 이루고 있는 다랑논들이 아직도 옛 모습 그대로 남아 있는 걸 글과 사진으로 보여주기 때문이었다.

매일경제

청산도 산책길(매경DB)


그렇게 농사를 지어서 농부가 한 해 벌어들이는 돈이 얼마나 되느냐고 물으면 정말 할 말이 없다. 하지만 얼마 되지 않는 소출에도 낙심하지 않고 거기에 의지해 자식들을 키워낸 부모님들이 여전히 그곳에 살며 농사를 짓고 있다.

보다 옛날에는 이 세상 모든 물건의 값을 쌀로 계산해서 정했다. 나라 관리의 봉급도 연간 쌀 몇 석, 콩 몇 석 하고 정해주었고 논밭의 가격도 쌀로 정하고, 그 논에서 일하는 일꾼의 품삯도 하루 몇 홉, 하고 쌀로 정했다. 이렇게 쌀이 가장 귀하던 시절에 비가 오면 물이 아래로 죽죽 빠져버리고 마는 모래질의 땅을 쌀농사를 짓기 위한 논으로 바꾸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했을까.

우리 조상들은 머리를 써서 생각했다. 부엌 아궁이에서 방 아래로 불이 들어가는 구들장을 응용해보면 어떨까. 물이 죽죽 빠지고 마는 땅에 큰 돌을 평평하게 구들장처럼 깔고 그 위에 진흙층을 덮어 아래로 물이 덜 빠지게 해서 거기에 벼를 심었다. 그리고 논의 구들장 아래로 불 대신 물이 흐르게 해 윗논에서 흐르는 물을 아랫논에 대게 하는 세계 유일의 기상천외한 방식의 관개수로를 처음 생각해냈다. 대체 그 분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그렇게 방이 아니라 논에 구들장을 놓고 진흙을 깔고 아래로 수로를 만들기 위해 흘린 땀은 또 얼마였을까.

이런 ‘청산도 구들장논’ 옆으로 청산도가 자랑하는 슬로시티 길이 있다. 이 길을 걸으며 우리는 쌀이 땅에 씨만 뿌리면 자라는 것이 아니라 저 옛날 글도 제대로 몰랐던 조상들의 지혜와 땀이 거기에 함께 배어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구들장논과 슬로시티 길의 조합만이 아니다. 가천다랭이논 옆에 경남 남해군이 자랑하는 바래길이 있으며, 하동의 야생차밭과 구례 산수유마을은 지리산 둘레길 옆에 있고, 제주 담밭은 제주 올레길, 진안 마을 숲은 그 마을의 고원길과 통한다. 강원도 정선 백전리 물레방아는 아리바우길 옆에 있고, 구름 위의 땅 안반데기는 강릉바우길의 한 코스이다.

길은 마을과 마을 사이를 잇는 동시에 그 마을들의 옛날 삶과 지금의 삶을 잇는다. 그리고 그 마을 군데군데 오랜 세월 우리의 삶을 지켜오고 이어온, 삶의 터전으로서의 문화유산들이 있다.

청산도 구들장논과 제주 담밭, 금산의 인산농업, 하동의 전통 차밭이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필리핀 이푸가오의 계단식 논과 페루 안데스 고원의 농업시스템과 함께 유엔 식량기구(FAO)가 선정한 세계중요농업유산에 등재되어 있다는 것도 나는 이 책 <농촌문화유산답사기>를 통해서 알았다. 어쩌면 옆에 두고도 우리만 우리 것이 얼마나 귀한지 잊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화려한 궁궐과 웅장한 사찰, 규모 큰 양반가의 고택만 우리의 문화유산이 아니다. 이 책을 읽다보면 예부터 먹고 사는 일에 대하여 고민한 우리 조상의 피땀 어린 들녘의 논밭이야말로 정말 우리가 잘 보존해야 할 또 하나의 문화유산이 아닌가 생각된다.

김유정 선생이 작품생활을 하던 1930년대 그때와 지금은 시대로는 너무나 다르다. 그때에도 일확천금을 노려 멀쩡히 농사를 짓던 콩밭을 파헤쳐 사금을 찾는 얼치기 농부가 소설 속에 나온다. 그런 중에도 소처럼 묵묵히 일해서 번 돈으로 농토를 늘리고 자식을 키운 농부도 있었다. 논밭에 심는 작물도 달라지고 농사법도 많이 달라졌다. 그렇게 많은 것이 달라진 가운데 지금까지도 아름답게 보존되어 오는 우리 농촌의 문화유산들이 있다.

우리는 정말 우리 국토를 얼마나 알고 있는 것일까. 교통이 발달하고 이동수단이 편리해져 전국이 일일생활권이 되니 국토가 좁다고만 여겼지 곳곳에 이런 삶의 문화유산이 있는지도 모르고 나라 좁은 타령만 하지는 않았는지 저절로 돌아보게 되었다.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사람들이 찾아오지 않는 문학촌 책방에서 나는 우리 농촌의 역사를 그대로 담고 있는 듯한 <농촌문화유산답사기>를 읽었다. 먹고 사는 일은 예부터 이렇게 힘들었구나. 쌀 한 톨을 얻기 위해 들인 정성이 이다지도 크구나.

내게는 이 책이 우리 농촌의 문화유산을 새롭게 알려주는 의미 있는 교양도서인 동시에 틈틈이 어디로 가면 좋을지를 알려주는 좋은 여행안내서이기도 했다. 다 읽고 나니 나처럼 누구에게도 이 책이 그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바로 힘든 환경 속에서도 새로운 것을 창조해낸 우리 조상의 후손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면 얼른 코로나19 바이러스부터 물리쳐야 할 것이다.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잡히면 이 봄과 여름엔 이런 곳들을 찾아보아야겠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다음 달엔 더 좋은 기운들이 우리 스스로에게서 나왔으면 좋겠다.

[소설가 이순원]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15호 (2020년 4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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