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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9 (일)

[정홍수 칼럼] 어떤 껴안음, 겨울나무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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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진정성’이 과도한 도덕적 명령의 자리를 차지하면서 여타 삶 곳곳의 세세한 민주주의를 외면하고 익히지 못한 대가를 지금 ‘386세대’는 혹독히 치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숨이 절로 나오는 지금의 ‘나’보다는 세상이 조금씩 더 나아져 왔다면 또 다른 ‘진정성’의 싸움이 계속되고 있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리라.

한겨레

정홍수 ㅣ 문학평론가

시인에게 탄식의 말을 배운다. “이렇게 한심한 시절의 아침에”라니. 근자에 출간된 백무산 시집(창비)의 제목이다. 이렇게 말해도 된다면, 시원하기까지 하다. ‘겨울비’라는 시의 마지막 연에 그 탄식의 언어가 나온다. “이렇게 한심한 시절의 아침에 겨울비 온다/ 어깨에 머리에 찬비 내린다 배가 고파온다/ 이제 나도 저기 젖은 겨울나무와 함께 가야 할 곳이 있다” 아침 일찍 문자메시지로 온 부고(‘노동자’의 죽음인 듯하다)에 겨우 행장을 꾸려 현관문을 나서는데 전화벨이 울리고 전화기 저편에서는 올 필요가 없다는 말을 전해준다. 새벽부터 천장에서 떨어져 거실 바닥을 흥건하게 만들던 찬 겨울비는 이제 어깨와 머리를 적신다. 식전이라 배도 고프다. 어째야 하나. 시는 여기서 갑자기 무언가를 건너버리며 끝난다. “이제 나도 저기 젖은 겨울나무와 함께 가야 할 곳이 있다”고.

이 돌연한 건너감은 많은 생각을 불러일으키지만, 일단 미뤄놓고 다른 시편들을 읽는다. 사실 ‘한심한 시절’이라고 탄식할 때 우리 누구도 그 ‘한심함’의 바깥에 있지 않다. ‘사랑 혹은 불가능’이라는 시에서 시의 화자는 후배의 주례 부탁에 “벌건 숯불을 깔고 앉은 듯”한 부끄러움을 느끼며 고백한다. “나는 믿음이라는 말을 싸구려로 만들었다/ 영원이라는 말도 잡동사니로 만들었다/ 세상에는 사랑이라는 이념과 영토가 분명 있지만/ 내가 그 나라에 기여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우리는 80년대 노동자 대투쟁의 현장에서 솟아오른, 노동계급의 육체와 시선으로 무장한 견결한 백무산의 시를 기억한다. 다음의 고백이 더 아프다. “사랑을 위한 것이라고 믿고 노동하고 피 흘렸지만/ 그 때문에 나는 멍청이가 되고/ 내 손길은 흉기가 되었다/ 정작 그 문은 열어보지도 못하고 끝장이 났다.”

며칠 전 우연히 <진정성 시대>라는 다큐를 보게 되었다. 어느 부녀가 티베트 고산을 힘겹게 오르고 있었다. 내 나이 어름으로 보이는 중년의 남자는 학생운동을 하고, 고문을 당하고, 감옥에 가고, 오래 시민단체 일을 한, 386세대(586세대)의 한 전형적인 삶을 살아온 것 같았다. 아이는 대안고등학교 졸업반으로 산행 중간에 그리는 그림을 보면 미술에 특별한 재능이 있는 듯했다. 그런데 부녀 사이에는 고산 트레킹의 힘겨움 때문만은 아닌, 이상한 서걱거림, 거리감이 있었고, 이번 산행은 그 거리를 회복하려는 노력처럼도 보였다. 다큐멘터리의 소제목은 ‘나는 잘 살아왔는가?’라는 직설적인 질문이었는데, 주인공 남자의 나지막하고 조심스러운 내레이션과 함께 설명하기 힘든 착잡함을 불러일으켰다. 그이는 건강을 해쳐 큰 수술을 받은 모양으로 지금은 고향에 내려가 있다고 했다. 찾아보니 다큐멘터리 <진정성 시대>는 지난해 10월 6부작으로 방영된 것으로, ‘촛불 광장’의 감격과 환희 이후 다시 우리 사회 곳곳에서 심상찮게 재연되고 있는 사회적 갈등의 뿌리를 짚어보려는 기획인 듯했다.

사회학자 김홍중은 지난 80년대를 ‘진정성’이라는 ‘마음의 체제’가 우세하게 작동했던 시대로 설명한 바 있다. 이때 ‘진정성’은 삶의 척도를 자신의 내면에서 찾으며, 그 양심의 기율에 따라 살아가고자 하는 태도를 가리킨다. 5월 광주의 참극 이후 ‘살아남은 자의 부끄러움’은 누구도 강요하지 않은 채로 “벌건 숯불”의 도덕적 명령이 되어 타오르고 있었고, 불의와 불평등, 폭압이 지배하는 세상과의 투쟁은 훼손될 수 없는 믿음이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라면 ‘진정성’의 시대가 분명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사회학적 분석이 불가피하게 구획 짓는 것과는 달리(‘포스트-진정성 시대’ ‘속물의 시대’ 등) 우리는 연속적인 존재이며, 종종 길을 잃고 헤매기는 하지만 어떤 식으로든 삶의 척도를 찾으려는 노력을 포기하지는 않는다. 생각해보면 ‘정치적 진정성’이 과도한 도덕적 명령의 자리를 차지하면서 여타 삶 곳곳의 세세한 민주주의를 외면하고 익히지 못한 대가를 지금 ‘386세대’는 혹독히 치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숨이 절로 나오는 지금의 ‘나’보다는 세상이 조금씩 더 나아져 왔다면 거기 저 부녀의 힘든 걸음과 같은 또 다른 ‘진정성’의 싸움이 계속되고 있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리라. 산행의 끝에 부녀는 껴안는다. 힘에 부친 듯 약간 거리를 둔 채. 백무산의 ‘겨울비’에서 걸려온 전화는 “올 필요 없답니다 민주화가 되었답니다”다. 그래도 시의 화자는 ‘어딘가’로 가기로 한다. 고산을 오르는 부녀의 힘겨운 걸음과 다시 가야 할 곳을 떠올리는 ‘겨울비’의 아침은 그리 다르지 않다고 나는 생각한다. 다음주 오늘은 선거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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