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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0 (월)

[부부 건축가의 세상짓기] 내 마음의 꽃밭 / 노은주·임형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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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노은주·임형남 ㅣ 가온건축 공동대표

어느새 모든 꽃들이 화려하게 피어나는 봄의 한가운데로 들어섰다. 내가 일하는 사무실 뒤편, 허름한 마당 한구석에 꽂아놓은 작대기처럼 비쩍 마른 라일락 나무에도 물기가 돌기 시작했다. 다가가서 자세히 들여다보니 나뭇가지 끄트머리가 바르르 떨리며 열심히 꽃을 밀어 올리고 있었다. 봄의 진동을 느끼며 그 앞에서 한참 동안 피어날 꽃을 응원했다.

꽃을 보면 기분이 좋아진다. 지금쯤이면 온 동네 꽃 소식이 소란스럽고, 고속도로나 국도에는 꽃 나들이 가는 사람들을 그득그득 실은 관광버스가 넘쳐날 때인데, 올해는 그런 모습을 보기 어렵다. 참 어려운 시절이다.

그럼에도 꽃은 때를 알아 여전히 피어오른다. 성수대교를 타고 한강을 넘을 때 창밖으로 보이는 응봉에는 마치 노란색 페인트를 끼얹은 것처럼 개나리가 가득 피어 있었다. 복수초가 피고 산수유가 수줍고 겸손하게 나뭇가지에 달리며 봄은 시작되고, 개나리 진달래 벚꽃이 피어나며 봄은 더욱 화려해진다.

집을 짓는 일은 안팎의 공사가 거의 끝날 무렵 마당 여기저기에 꽃밭을 만들며 마무리된다. 그건 마치 오랜 시간 정성을 다해 음식을 만들 때 마지막으로 마무리 양념을 하고 고운 빛깔의 고명을 얹는 것과 같은 일이다. 꽃밭을 만드는 것은 사계절을 집안에 들이는 일이고, 무미건조한 재료들을 쌓아 올린 건축물에 생명의 빛을 더하는 일이기도 하다.

올봄에 마무리하는 세 식구가 살 언덕 위의 집에도 꽃 심을 궁리를 열심히 하고 있다. 꽃을 생각하고 나무를 생각하는 이때가 제일 즐겁다. 조경이니 정원이니 하는 거창한 말보다 꽃밭이나 뜰이라는 말이 훨씬 와닿고 정겹다. 꽃밭을 가꾸는 일은 단지 아름다운 그림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마당을 생활 속으로 넣는 일이고 사람과 꽃과 풀을 섞는 일이다. 오랜 시간 전해 내려오는 우리네 마당이나 뜰은 무슨 의도로 만들었다고 사람들에게 부리는 허세가 없다. 그저 자연의 한 부분을 덜어온 듯 편안하다.

여러 가지 생각을 하다가 생명력이 강해 스스로 잘 자라는 들꽃을 꽃밭에 심기로 했다. 우리가 흔히 아는 개망초 민들레 애기똥풀부터 깽깽이풀 닭의장풀 세대가리 꿩의비름 긴병꽃풀 바람꽃 너도바람꽃 처녀치마 뽀리뱅이 방가지똥 뚱딴지 등등. 이름도 재미있고 피어 있는 모습도 예쁘다. 그 꽃들을 불러보는 것만으로도 기쁨과 희망이 솟는다.

올봄엔 여기저기 집의 여백이나 도시의 여백에 풀을 심고 꽃을 심자. 그런 공간적인 여백이 없으면 내 마음에라도 꽃밭을 만들자. 그곳에 우리가 아는 꽃들을 가득 채우고 이름을 불러보면 바깥에 나가지 못해도 봄의 희망이 솟아날 것 같다. 어려운 시기일지라도 걱정과 미움은 걷어내고 내 마음의 꽃밭에서 희망의 꽃을 피워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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