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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0 (월)

[여적]‘씨앗 방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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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경희궁에 핀 산수유 / 권호욱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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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위 78도, 노르웨이 북쪽 스발바르 제도. 사람이 사는 지구의 최북단 지역이다. 북극 가까운 이곳에 2008년 국제종자저장고가 세워졌다. 식물 멸종에 대비해 종자를 저장·보존하는 시설이다. 현재 세계 각국에서 맡긴 종자 100만개가 보관돼 있다. 성서에 나오는 ‘노아의 방주’에 빗대 ‘씨앗 방주’로 불린다. 천재지변이나 전쟁·핵폭발 같은 대재앙에도 씨앗을 지키는 보루로 남을 수 있어 ‘인류 최후의 날 저장소’라고도 한다. 영하 18도를 유지하는 길이 120m·깊이 50m의 땅굴 기지인 이 저장고는 소행성 충돌에도 견딜 수 있는 강력한 내진 설계로 지어졌다.

한국에도 씨앗을 영구 보존하는 시설이 있다. 2017년부터 가동된 산림청 국립백두대간수목원 내 종자보관소다. 경북 봉화군 춘양면에 있다. 영하 20도·습도 40% 이하를 항상 유지하는 지하터널로 지어진 점은 노르웨이 국제종자저장고와 비슷하지만, 여기서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야생식물 종자도 보관한다. 씨앗 금고라는 뜻의 ‘시드 볼트(seed vault)’가 공식 명칭인데 한국판 ‘씨앗 방주’라 할 수 있다. 2023년까지 한국뿐 아니라 아시아 등 세계 각지의 씨앗 30만개를 수집할 계획이다.

한국의 ‘씨앗 방주’에 중요한 종자가 새로 들어갔다. 전남 구례의 국내 최장수 산수유 시목(始木)의 씨앗이 엊그제부터 영구저장됐다. 지난가을 열매에서 확보해 말려둔 씨앗이다. 구례군 산동면 계척마을에 있는 이 나무는 수령이 최소 수백년은 될 것으로 추정된다. 구례군에 따르면 1000년 전 중국 산둥성에서 들여온 것으로 알려졌다는데 확인되지는 않았다. 국립백두대간수목원은 한 마을의 전설과 사연을 담고 있는 오랜 거목의 종자를 보존한다는 데 의미가 있다고 했다.

산수유는 봄의 전령이다. 온 산이 노랗게 물든 구례 산수유마을 풍경은 봄의 상징이다. 소설가 김훈은 “산수유는 꽃이 아니라 나무가 꾸는 꿈처럼 보인다”고 했다. 올봄에도 산수유는 흐드러졌지만 산수유꽃 축제는 코로나19 때문에 취소됐다. 마음이 불안하니 길을 선뜻 나서기가 어려워졌다. 씨앗을 방주 속에 고이 간직했으므로 산수유는 세세만년 만발할 수 있을 것이다. 그걸로 올봄 꽃구경 못 간 아쉬움을 달랠 수밖에.

차준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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