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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8 (수)

[주경철의 히스토리아 노바] [12] 조작된 아테네 도편 투표… ‘그리스 이순신’ 추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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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테네의 민주정… 민주주의의 기원?]

BC 472년 시민 6000명 투표로 살라미스 해전의 영웅 테미스토클레스 쫓아내

선거구 개편도 귀족들만 이득… 민주주의 원조 맞나

독재자 막는 ‘도편 추방’도 변질

추방하고 싶은 사람 이름 적어 정치가들 정적 제거 수단으로

조선일보

현대 민주주의의 기원으로 치는 고대 아테네의 정치 제도는 과연 어느 만큼 민주적이었을까?

아테네 사회가 발전하면서 맞닥뜨린 문제는 오늘날 우리 문제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귀족층이 지나치게 강한 권력을 장악한 데다가 사업에 성공한 평민층 일부가 큰 부를 차지하게 된 반면, 많은 서민은 빚에 시달리다가 채무 노예로 전락했다. 자연히 계급 갈등이 격화되고 범죄도 증가했다. 사회의 근간을 흔드는 심각한 부익부 빈익빈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고대 아테네도 맞닥뜨린 富의 집중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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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그리스 장군이자 정치가인 테미스토클레스.


여러 방안이 나왔다. 드라콘(Dracon)이 이룬 법의 성문화(成文化)가 첫째 단계다. 강력한 법을 통해 질서를 잡자는 의도다. 그렇지만 그가 만든 법은 좀도둑을 사형에 처하는 식으로 너무 엄격했다. 살인자와 좀도둑을 똑같이 사형하는 것이 사리에 맞지 않는다고 비판하자 드라콘은 이렇게 답했다. "살인자에게 더 심한 벌을 주어야 하는데 사형보다 더한 벌이 없군요." 당연히 반발이 따랐고, 이 방식으로 사회 모순을 해결하기는 쉽지 않았다.

다음에 등장한 솔론은 별명이 '조정자'였다. 그는 처벌이 능사가 아님을 깨닫고, 사회적 중재안을 만드는 데 주력하였다. 우선 채무 때문에 노예가 된 시민들을 복권시켰으며, 토지 소유 상한제를 실시했고, 귀족과 평민이 함께 모여서 국정을 논의하는 400인회, 시민 중 누구라도 추첨으로 참여할 수 있는 배심원 제도를 마련했다. 솔론의 개혁 입법은 큰 기대를 걸 만했지만 실제적 성과는 보지 못했다. 갈등을 '조정'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상층 사람은 자기 권익을 빼앗겼다고 불만이고, 하층 사람은 실질적으로 얻은 게 하나도 없다고 불만이었다.

문제가 쉽게 해결되지 않자 법과 제도보다는 힘으로 문제를 풀겠다는 인물이 나왔다. 불법으로 권력을 찬탈하고 독재를 행하는 인물을 참주(僭主·tyranos)라고 부른다. 페이시스트라토스가 권력을 잡아 참주가 되었는데, 의외로 경제 부흥과 문화 발전을 가져와서 좋은 평판을 얻었다. 그러나 권력을 물려받은 아들 히피아스는 무도한 정치를 펼치며 정적들을 억압했다. 국외로 망명한 반대 세력이 스파르타 세력을 등에 업고 반(反)참주 운동을 펼쳐 끝내 히피아스 일당을 추방하는 데 성공했다.

참주 타파의 선봉에 섰던 클레이스테네스가 권력을 잡고 본격적인 개혁을 수행하여 소위 아테네의 민주정을 완성했다. 그는 '법 앞의 평등'을 뜻하는 '이소노미아(Isonomia)'를 구호로 내걸고 급진적 정치 개혁 프로그램을 실천했다. 우선 귀족들의 권력 기반인 부족제부터 손봤다. 아테네에는 전통적으로 네 부족(phyle)이 있었는데, 각 부족에서는 영향력 있는 가문들이 지배권을 행사했다. 전통적 부족 질서를 통해 귀족이 권력을 장악하는 이런 구태가 지속되는 한 개혁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클레이스테네스는 완전히 판을 갈아엎고 대신 교묘하기 짝이 없는 제도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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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480년 9월 아테네 함대를 주력으로 한 그리스 연합 해군이 페르시아 해군을 괴멸한 살라미스 해전. 이 전쟁의 영웅 테미스토클레스는 도편추방제의 희생자가 되어 나라를 떠나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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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테네 전국을 '시내(asty)' '해안(paralia)' '산지(mesogeia)' 세 지역으로 나눈 다음, 각 권역을 다시 작은 단위인 '트리튀스(trittys·1/3이라는 뜻)' 10개로 잘게 나누었다. 그런 다음 '시내'의 트리튀스 하나, '해안'의 트리튀스 하나, '산지'의 트리튀스 하나씩을 묶어서 새로운 부족으로 만들었다. 인위적으로 짜깁기한 완전히 새로운 정치 단위 10개가 만들어진 것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억지로 예를 만들어보자면, 서울 강남 갑, 대구 달서 을, 전남 목포를 묶어서 새 선거구를 만드는 식이다. 이제 기존 혈연관계가 작동할 여지가 전혀 없다. 대신 이 모든 제도 아래에 있는 가장 밑바닥 단위인 데모스(demos), 즉 촌락이 새 정치 제도의 근간으로 작동했다. 데모스가 관리하는 명부에 등록된 시민 중 추첨으로 뽑은 사람들이 평의회에 나가 국정에 참여했다. 이처럼 평민들 힘이 대폭 신장된 '데모스를 통한 지배'인 '데모크라티아(democratia)'가 곧 민주주의(democracy)라는 말의 기원이다.

도편 추방은 정치적 평등을 가져왔나?

클레이스테네스가 만든 또 하나 중요한 제도는 오스트라키스모스(ostracismos), 즉 '도편(陶片)추방제'다. 국가에 해를 끼칠 우려가 있는 자, 특히 독재자가 될 가능성이 있는 자를 사전에 콕 집어 국외 추방해 버리자는 제도다. 그 과정은 이렇다. 연초에 그해 도편추방 제도 시행 여부를 민회에서 논의한다. 시행하기로 결정하면 두 달 뒤에 시민들이 추방하고 싶은 사람 이름을 도자기 조각(도편·ostrakon)에 적어서 미리 준비한 항아리에 넣는다. 이때 6000표 이상을 얻은 사람은 열흘 내에 아테네를 떠나야 한다. 그 사람은 10년이 지나서야 돌아올 수 있으며, 중간에 들어오면 사형에 처한다. 다만 재산은 몰수하지 않으며, 긴급 상황에서 국가가 결정하면 만기 전에 입국할 수 있다. 이런 제도는 정말로 정치적 평등을 가져왔을까? 그렇지는 않아 보인다. 아테네의 데모크라티아가 오늘날 민주주의와 같고 클레이스테네스는 민주 투사라고 생각하면 순진한 판단이다. 노회한 정치가 클레이스테네스는 자신의 권력을 위협하는 정적들이 힘을 쓰지 못하도록 제어했을 뿐이며, 자기를 지지하는 한에서만 평민들의 힘을 이용하려고 했다. 실제로 모든 평민이 골고루 권력을 향유하지 못하고 '시내' 지역 사람들에게 유리하게 판이 짜였다. 아르콘(archon)이라고 하는 고위 행정직의 피선거권은 상층 계급에게만 열려 있었으며, 테테스(thetes)라는 가난한 하층 계급은 생계에 바빠서 정치 참여가 힘들었다. 결국은 '귀족들만의 동등한 지배'로 귀결되었을 뿐이다. 고대 아테네 민주정의 실상은 정치 공학 냄새가 물씬 난다. 그런데 역사의 흐름은 그와 같은 간사한 의도를 추월해 버리곤 한다. 제도적 미비점에도 불구하고 아테네인들은 결과적으로 더 큰 정치적 권리를 누리는 방향으로 한 걸음씩 나아갔다. 오늘 우리가 맞이한 코미디 같은 선거 제도에 대해서도 비슷한 판단을 할 수 있다. 비록 불합리한 점이 있다 하더라도 선거에 참여해서 민의를 모음으로써 민주주의를 진척시킬 수 있다.

[그리스 시대에도 투표조작… 한 사람 글씨체가 투표지 도편서 여러개 나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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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편추방제를 도입한 아테네의 정치인 클레이스테네스.


도편추방제는 원래 의도대로 독재 방지 효과가 있었을까. 페르시아 전쟁의 영웅 테미스토클레스 사례를 보자. 기원전 493년 아테네의 최고위 행정직에 선출된 그는 곧 물밀듯 밀려오는 페르시아 제국의 대군에 맞서 싸워야 했다. 마라톤 전투(490)에서는 장군으로서 군을 지휘했고, 2차 페르시아 전쟁(480~479)에서는 그리스 연합 해군을 지휘하여 살라미스 해전에서 결정적 승리를 거두었다. 풍전등화의 위기에서 그리스 세계를 구한 영웅이 된 것이다. 이게 화근이 되었다. 강력한 권력과 권위를 누리게 되자 국내외에서 공격이 쏟아졌다. 이웃 국가 스파르타가 자국 내의 반역 음모에 테미스토클레스가 연루되었다고 주장했고, 아테네 내부적으로도 그가 오만한 독재자처럼 군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472년(혹은 471년)에 그는 도편추방제에 따라 나라를 떠나야 했으며, 마케도니아를 거쳐 페르시아로 가서 생을 마쳤다. 그런데 최근 테미스토클레스의 이름이 적힌 도편들을 살펴본 연구자들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많은 도편이 한 사람의 글씨체로 쓰여 있지 않은가. 테미스토클레스를 몰아내기 위해 미리 그의 이름을 쓴 도편을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투표하는 조작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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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482년 도편추방제에 사용한 도자기 파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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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경우에서는 합리적 견해보다도 감정적으로 대응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가문 내 누군가가 신성한 아크로폴리스 사원에서 살인을 저질렀다는 이유로 알크메오니드(Alkmaeonidae) 같은 명문가 사람들이 도편에 이름이 오르곤 했다. 462년에 추방당한 시몬은 누이와 근친상간 관계라는 소문이 돌았다. 한 도편에는 ‘시몬, 네 누이 알피니케 데리고 꺼져’라고 쓰여 있다. 한편, 이 제도를 만든 클레이스테네스 자신이 제일 먼저 도편추방 대상자가 되었다는 말이 있지만 확실치는 않다.

[주경철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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