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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8 (수)

[데스크의눈] 그래도, 투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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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저기 ‘열린, 미래, 더불어…’ / 비슷비슷한 당명·노선에 혼란 / 정치권이 ‘깜깜이 선거’ 부채질 / 국가적 위기 속 ‘일꾼’은 뽑아야

솔직히 고백하면, 필자는 아직도 정당 이름이 헷갈린다. 21대 국회의원 선거가 고작 일주일 남았는데 이 모양이다. 직업에 맞지 않는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김종인 미래통합당 총괄선거대책위원장의 연이은 실수를 보며 위안을 삼는다.

이유를 찾자면 서너 가지쯤 들 수 있겠다. 무엇보다 갈수록 떨어지는 기억력이 주범이다. 술자리 횟수에 반비례 중인 기억력은 가끔 전날 저녁 자리를 함께한 지인 이름까지 가물가물하게 하니 당명이야 오죽할까 싶다.

세계일보

안용성 특별기획취재팀장


탓을 밖으로 돌리면, 아무래도 이번 선거에 관심이 전보다 덜한 이유다. 온 국민의 시선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에 쏠린 상황에서 총선에 관심도가 떨어질 수밖에 없다. 투표소로 가는 것 자체가 위험을 감수해야 하니 말이다. 국가적 위기 속에 투표가 제대로 치러질지를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다.

또 하나 중요한 이유는 ‘당명’ 자체에 있다. 더불어민주당, 미래통합당, 미래한국당, 더불어시민당, 열린민주당, 민생당, 정의당, 국민의당, 민중당, 녹색당, 대한민국당(이하 무순) 등등. 여기저기 ‘열린, 미래, 통합, 더불어’가 넘쳐난다. 비슷비슷한 이름에 비슷비슷한 노선을 표방하며 혼란을 부추긴다.

족보를 따져보면 시쳇말로 ‘혼돈의 카오스’다. 더불어민주당과 위성정당인 더불어시민당, 노선이 비슷한 열린민주당, 미래통합당과 위성정당인 미래한국당, 호남에 기반을 둔 민생당, 대한애국당은 자유공화당을 거쳐 다시 우리공화당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사퇴 요정’이 만든 한국경제당에 친박신당, 새누리당도 있다. 국가혁명배당금당, 새벽당, 자영업당 등 독특한 당명도 투표용지 한쪽을 차지하고 있다.

선거제도 개편과 함께 처음 치르는 이번 총선의 비례대표 투표용지는 48.1㎝에 달한다. 역대 최대 길이로, 35개 정당이 3번부터 37번까지 빼곡히 적혀 있다. 특히 이번엔 위성정당이라는 듣도 보도 못한 형태의 정당이 출현했다. 공약집을 짜깁기했다가 들통나 하루도 안 돼 철회하고, 똑같은 서체와 디자인의 버스를 타고, 당 이름만 다르고 나머지는 똑같은 점퍼를 뒤집어 입고 유세를 하고 있다. 생겼다 없어지고 또 생겨나는 게 정당사라고 하지만, 이번엔 대국민 우롱에 가깝다. 개악된 선거제로 인해 정치 혐오는 더욱 심해졌고 투표소로 가는 발걸음은 그만큼 더 무거워졌다.

“찍을 사람도 없고, 찍을 당도 없다.” 얼마 전 카카오톡으로 대화하던 한 지인의 푸념이다. 그는 “하는 짓이 똑같은데, 비례는 뭐하러 뽑는지 모르겠다”고도 했다. 정치권 스스로 ‘깜깜이 선거’를 부채질하고 있는 셈이다.

분위기가 이렇다 보니 투표율도 걱정이다. 총선 투표율은 18대 총선(2008년)에서 46.1%로 최저를 기록했다. 19대 54.2%, 20대 58%로 상승세를 보였지만, 이번 총선에서는 코로나19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 등이 부정적 영향을 미칠 것으로 우려된다.

더구나 이번 총선은 일부 재외국민의 투표권까지 제한됐다. 선관위는 코로나19 확산으로 총 57개국 93개 공관에 대해 이번 총선 재외선거 사무를 중지했다. 투표하고 싶어도 못한 재외선거인이 8만8087명에 달했다.

정치가 염증을 일으켜도 투표는 계속돼야 한다. 미국의 대표적인 진보 석학으로 꼽히는 놈 촘스키는 “대통령을 뽑는 것보다 의원을 뽑는 게 더 중요한 일”이라며, 그 이유로 “국가 정책이 미치는 압력이 하층부로 내려갈수록 더욱 커지고 직접적이 되기 때문”이라고 했다. 우리 생활에 필요한, 밀접한 정책을 만들어내는 국회의 중요성을 강조한 말이다.

코로나19로 인한 경제·사회적 피해가 가늠할 수 없을 정도다. 더구나 이 같은 위기가 언제까지 이어질지조차 모른다. 새롭게 꾸려질 21대 국회는 경제 위기를 극복하고 사회안전망을 갖출 일꾼들로 채워져야 한다. 이번 투표가 어느 때보다 중요한 이유다. 다행히 일꾼을 고를 시간이 ‘아직’ 일주일이나 남았다.

안용성 특별기획취재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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