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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3 (목)

[분수대] 진검승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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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박진석 사회에디터


허공을 가른 두 개의 칼이 무사들의 어깨에 내리꽂혔다. 다행히 목검이라 끔찍한 결과는 없었지만, 속도가 워낙 빨라 승자를 가리기 어려웠다. 한쪽이 외쳤다. “내가 이겼지?” 상대편이 냉담하게 받아쳤다. “아니, 졌어. 진검이었으면 너는 죽었을 거야.”

격분한 무사는 “그럼 진짜 칼로 승부를 가려보자”며 칼을 뽑았다. 적수는 “정말 죽을 수도 있다”고 경고했지만 먹히지 않자 어쩔 수 없이 칼을 뺐다. 숨 막힐 듯한 침묵을 깨고 두 칼이 춤을 춘 순간, 비명이 솟구쳤다. 먼저 도발했던 무사는 피를 뿜으면서 천천히 옆으로 쓰러졌다.

일본 영화감독 구로사와 아키라(黑澤明)의 대표작 ‘7인의 사무라이’ (1954) 속 장면이다. 이 시퀀스 속에는 흔히 말하는 ‘진검승부’의 냉혹함이 제대로 담겨 있다. 진검은 뽑혔으면 상대를 죽여야 소임을 완수하는 존재다.

아무래도 범여권이 검찰과의 진검승부를 각오한 모양이다. 최근 쏟아지는 범여권 논객들의 검찰 비판 발언에는 흥미롭게도 은근한 자신감이 배어난다. “윤석열 검찰총장 가족이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 수사 대상 1호가 될 수 있다”는 발언이 실마리를 준다. 이들은 7일 윤 총장 부인을 검찰에 고발하면서도 “공수처가 나설 수도 있다”고 재차 압박했다. 이르면 7월 현실화할 공수처가 힘을 불어넣은 듯하다. 관련 사안의 공수처 고발은 기정사실로 보이며 수사로 이어질 가능성도 작지 않다. 물론 검찰도 총선 이후 범여권의 아킬레스건을 건드릴 사건들의 수사 본격화를 예고한 상태다. ‘국리민복’ 차원에서 두 세력의 진검승부가 나쁠 것은 없다. 검찰 비위를 밝혀내면 공수처의 순기능은 즉시 입증된다. 물론 검찰이 권력 비리를 낱낱이 파헤친다면 그 역시 박수받을 일이다.

다만 한쪽은 진검을 쓰는데, 다른 쪽은 목검이나 ‘적수공권’(赤手空券)으로 대항하는 일은 없다는 전제에서다. 검찰 인지 사건을 빼앗아갈 수 있는 공수처법 조항이나, 공수처는 범접조차 못 할 대규모 검찰 ‘병력’ 등을 고려하면 반칙 시도 가능성은 충분하다.

영화에서 무사들의 ‘꼼수’ 가능성을 원천봉쇄한 건 구경꾼들이었다. 그런 일이 현실화하면 국민이 그 역할을 해야 한다. 어려운 건 아니다. 그저 지켜보고 있다는 것만 그들이 알도록 하면 될 일이다.

박진석 사회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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