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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6 (일)

[서소문 포럼] 모호한 말, 모호한 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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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에 정책 검증 실종된 선거판

포퓰리즘 기반 복지 근본주의 창궐

칵테일 위기에 빠져 허덕이는 경제

전문가 중심의 결단력 있어야 극복

중앙일보

김기찬 고용노동전문기자


“고마운 것 같아요.” “미안한 것 같아요.” 이게 무슨 말인가. 고맙다는 건지, 미안하다는 건지, 아니면 고마운 게 미심쩍다는 건지, 여차하면 속내를 뒤집을 수 있다는 것인지 명확하지 않다. 말하려는 의도를 모르는 바는 아니다. 한데 영 희한한 화법이다. ‘고맙다’ ‘미안하다’하면 되는데, 그런 감정 표현조차 결론을 못 내리고 왜 찜찜하게 얼버무릴까. 자신감이 없어 보이고, 눈치를 보는 듯한 이런 모호한 말이 언제부터인지 새로운 화법인 양 번지고 있다.

세상이 이도 저도 아닌, 물에 물 탄 듯 흘러가서 그런가. 하기야 “요즘 뭐 하나 명쾌한 게 있나”라는 어느 경제학자의 말처럼 정치도 정책도 그저 두루뭉술하게 그때그때 끼워 맞춰 굴리는 느낌이다. 오죽하면 선거철인데도 정책을 검증하는 장면을 보기 힘드니 말이다. 소득주도성장, 원자력 정책 등 논란이 된 것들이 얼마나 많았는가. 그런데 이런 정책의 결과에 대한 심판장 격인 선거판에선 쏙 들어갔다. 말이 나오는 것 자체를 두려워하는 듯한 인상마저 준다. 그만큼 자신감이 없다는 것 아닌가.

노무현 전 대통령은 꽤 명쾌했다. “대통령 못해 먹겠다”는 식의 직설 화법으로 가끔 논란이 일기는 했지만, 정책을 수정할 땐 과감히 고치거나 방향을 틀고, 심지어 지지층을 꾸짖을 땐 추상같았다. 노 전 대통령은 자타공인 진보 인사였다. 그런 그가 2007년 6월 참여정부 평가포럼에서 이렇게 말했다. “환경, 건강과 교육의 산업화 문제에 관해서는 우리나라의 ‘복지 근본주의’를 주창하는 사람들 때문에 매우 더딥니다. 공공 서비스는 공공 서비스대로 확충하되 산업적 영역에서 국가 간 경쟁을 해야 할 곳은 해야 하는데, 이 부분의 산업적·시장적 원리의 도입을 강력 반대하는 사람들 때문에 좀 지지부진하고 있어서 매우 아쉽게 생각합니다.” 국가가 책임져야 할 복지의 영역과 시장의 영역을 혼동하지 말라는 경고다. 복지를 전가의 보도인 양 포장하는 진보 진영에 대한 꾸중이기도 하다. 복지라는 이름으로 포퓰리즘이나 선동적 행동을 하지 말라는 의미 아닐까. 그래서 이슬람 근본주의, 기독교 근본주의 같은 교조주의에나 쓸 법한 ‘근본주의’를 복지와 결합해 꼬집었다.

중앙일보

서소문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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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해야 할 것과 시장에 맡겨놓을 일을 명확하게 구분할 수 있다면 정책이 우왕좌왕할 리 없다. 어설프게 시장 영역을 규제하려 하고, 장마당에 뛰어들어 호령하려 하니 문제가 생기는 거다. 이렇게 되면 정책을 수립하고 집행하는 최일선의 공무원부터 주눅 든다. 정책의 모호함은 그 와중에 생긴다. 찍혀서 좋을 것 없다는 식의 눈치 보기에다 결단력이 부족하지 않은데도 일단 유보하고, 자신감을 상실하면서다.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당·정·청 회의에서 긴급재난지원금을 중위소득 70% 이하에게 100만원씩 지급하자는 더불어민주당의 압박에 “기록으로라도 반대의견을 남기겠다”고 한 것도 따지고 보면 면피를 위한 행동으로 읽힐 수 있다. 정부 내 경제 전문가이자 경제 정책의 수장조차 총선을 앞둔 여당의 힘에 눌려 기를 못 펴는데, 일선 공무원이야 오죽할까. 어설프거나 얼버무린 정책은 모호함을 심화시켜 결국에는 국가와 시장에 상처를 내는 악순환 고리를 만들기에 십상이다. 여당이고 야당이고 할 것 없이 이젠 “전 국민에게 지원금을 주자”는 식으로 번진 것만 봐도 그렇다. 나라 곳간의 사정과 논리가 안 통하고 전문가조차 기가 꺾이니 ‘복지 근본주의’가 창궐하는 꼴이다.

하루 6000명이 새로 실업급여를 신청하는 노동시장이라고 다를 게 없다. 과감한 정책이 안 보인다. 그저 돈만 뿌린다. 일자리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돈을 확 푸는 걸 탓할 수만은 없다. 과연 돈만으로 일자리를 유지할 수 있을까. ‘다른 방법은, 혹 병행할 수 있는 정책은 없을까’라는 고민을 하면 어떨까. 유럽 국가도 막대한 지원금을 일자리 유지를 위해 퍼붓는다. 그러면서 노동법의 효력을 일시 정지시키는 정책까지 마다치 않는다. 우리도 쓸 방법은 많다. 고용유지지원금을 그냥 막 주지 말고 취약계층인 비정규직 근로자 해고 방지를 위한 총량제를 조건으로 내건다든지, 불가피한 경우 임금·단체협약의 적용을 일시 정지할 수 있게 사업장에 맡기는 식이다.

이미 한국은 악재에 악재가 더해진 칵테일 위기에 빠졌다. 달콤한 이념으로 버무린 독한 정책을 마신 상태에서 코로나 바이러스까지 덮쳐 취할 대로 취했다. 술집에서 나오려 발버둥 쳐야 한다. 근본주의도 모호함도 털어낸 결단력 있는 정책을 보고 싶은 이유다.

김기찬 고용노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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