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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2 (일)

[일사일언] 춘사월의 고분 벌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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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이광표 서원대 교수


매년 이맘때, 이색적인 봄소식이 들려온다. 태조 이성계 무덤의 억새 베기와 이순신 장군 동상의 세척 소식이다. 며칠 전, 구리 동구릉 내 건원릉에서 억새 베기 작업이 있었다. 태조 이성계의 무덤에 억새라니. 이성계가 "함흥 땅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나자 태종 이방원이 함흥에서 흙과 억새를 가져다 무덤을 조성했다. 그 억새가 지금도 무성하게 자라고 매년 한식에 맞춰 억새를 예초(刈草)하는 것이다.

서울 광화문광장에선 봄을 맞아 이순신 장군과 세종대왕의 동상을 세척한다. 저압세척기로 물을 뿌려 한 해 동안 쌓인 때를 씻어내고 부드러운 천으로 이물질을 닦아낸다. 세척에 앞서 표면의 주조 상태도 점검한다. 세종대왕 동상은 얼마 안 됐지만 이순신 장군 동상은 1968년 제작됐다. 이제 50년이 넘었으니 문화재의 반열로 들어섰다.

여름이 되면 경주의 대형 고분과 주요 유적지에선 잔디 깎기가 진행된다. 여기엔 대략 70여 명이 40여 일 동안 매달린다고 한다. 대형 고분은 경사가 심하기 때문에 잔디 깎는 것이 보통 일이 아니다. 그래서 통상 3인 1조가 되어 작업을 한다. 고분 꼭대기에 위치한 작업자는 예초기에 연결된 줄을 잡아 중심을 유지한다. 중간쯤 위치한 작업자는 마치 사과를 깎듯 예초기를 밀고 아래쪽에선 뒤따르는 작업자가 잘린 풀을 정리하는 식이다.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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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8월 어느 날, 경주 봉황대 고분 앞 카페에 앉아 유리창 너머로 예초 모습을 구경한 적이 있다. 여름 한낮의 정적을 깨며 윙 하고 돌아가는 예초기 소리, 더디지만 한 줄 한 줄 깔끔하게 단장되는 초록의 고분. 카페의 한 손님은 "1970~1980년대엔 중고등학생들이 낫과 갈고리 빗자루를 들고 벌초했는데"라고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고분의 경사면이 옛날 중고생의 머리 깎는 모습 같았다. 동상을 세척하고 고분의 잔디를 깎는 일. 그걸 구경하는 건 묘한 중독성이 있다. 열심히 구경하다 보면 마음이 맑아지는 것 같다.

[이광표 서원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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