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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5 (수)

[기자수첩] 2050년 개봉작 '범죄와의 전쟁: 사이버 조폭 전성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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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비즈



2012년 개봉 영화 ‘범죄와의 전쟁: 나쁜놈들 전성시대’는 한국 조폭 역사상 최전성기였던 1980년대를 그리며 조폭들이 어떻게 성장했는지를 통렬하게 보여준다. 한국 조폭사의 한 획을 그은 ‘양은이파’, ‘범서방파’ 모두 이 시기 탄생했다. 하지만 노태우 정부의 ‘범죄와의 전쟁’으로 이들의 세가 위축되고 사실상 지리멸렬한다.

미래에는 한국의 2020년대 범죄 역사를 어떻게 기억할까. 이대로라면 2050년쯤 ‘범죄와의 전쟁: 사이버 조폭 전성시대’란 영화가 개봉할 것이란 상상의 나래를 펼쳐본다. ‘범죄와의 전쟁: 나쁜놈들 전성시대’가 1982년 부산항을 배경으로 시작했다면, ‘범죄와의 전쟁: 사이버 조폭 전성시대’는 2020년 n번방의 ‘텔레그램’으로 시작할 것이다.

최근 대규모 디지털 성범죄, 성착취 사건인 n번방·박사방 사태가 국민들에게 가져다 준 충격은 과거 화성연쇄살인사건 못지 않을 것이다. 미성년자를 포함한 일반 여성들을 상대로 조직적인 신상 협박을 통해 성착취 영상물을 제작하고, 이를 수만명에게 판매한 것은 영화 속에서도 상상하기 어려운 범죄이기 때문이다.

조폭의 세계는 지속적으로 변화한다. 김두환 시절 일명 ‘낭만주먹’ 시대에서 정치 조폭, 전국구 조폭, 기업형 조폭까지 진화하다 이제는 사이버 조폭이 나타난 것이다.

박사방의 운영자인 조주빈, 박사방의 시초인 n번방 운영자 ‘갓갓’ 등을 포함한 성착취 방 운영진의 수단은 사이버를 기반으로 한 신(新) 조폭의 성격을 띄고 있다고 해도 과장이 아니다.

이들은 자신에게 동조하는 유료회원을 ‘직원’으로 지칭하고 피해자들을 성폭행하도록 지시하거나 성착취물 유포, 자금세탁, 대화방운영 등의 임무를 맡겼다. 직원 회원이 되려면 새끼손가락과 얼굴이 나온 사진과 신분증 등으로 박사에게 인증하는 등의 모습은 조폭의 충성서약 과정과 유사하다.

유력 방송 언론인과 광역자치단체 시장까지 지냈던 인물들을 가지고 논 조주빈의 수완에 놀랄 수밖에 없다. 특히 박사방의 핵심 일당에 시청 공무원, 사회복무요원, 현역 군인까지 참여하고 있는 것은 ‘범죄와의 전쟁: 나쁜놈들 전성시대’에서 세관공무원으로 근무하던 최익현(최민식)이 우연히 조폭 세계에 발을 담그게 된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범죄에는 항상 목적이 있는데 조주빈의 말에 따르면 박사방 역시 돈을 목적으로 했다고 한다. 정부 권력보다도 위에 있는 중남미의 콜롬비아, 멕시코 마약 카르텔도 처음에는 평범했던 농민들이 돈을 벌기 위해 시작한 조합이 시초다.

조주빈을 포함한 운영진을 잡아들이고 단순히 처벌 수위를 높이는 것만으로 사이버 조폭들이 사라질까. 이미 제2의 조주빈, 제3의 조주빈이 우리 도처에 있을 것이다. 앞으로 사이버 범죄의 파괴력은 더욱 커질 것이다. 5G(5세대) 이동통신으로 온라인 디지털 생태계가 오프라인, 실물경제와 융합되며 우리 삶에 끼치는 영향력이 확대될 수밖에 없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사태로 원격 근무 등 디지털 생태계 정착이 가속화될 것이란 전망도 있다.

범죄 조직의 3대 요소는 흔히 도박, 성범죄, 마약으로 꼽힌다. 이 중 이미 불법 도박은 온라인 스포츠 토토 등으로 뿌리가 걷잡을 수 없이 퍼졌다. 사행산업통합감독위원회에 따르면 국내 사이버 도박 시장규모는 25조1000억원으로 전체 불법도박의 30.1%를 차지하고 있다.

조직적 사이버 성범죄 또한 이번 사태로 수면 위로 올라왔다. 그다음은 마약이다. 이미 국내에서도 다크웹을 통한 마약 거래는 남의 나라 이야기로 하기에는 점차 확대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를 방치하다가는 앞으로 한국이 제2의 멕시코로 전락하지 말란 법이 없다. 사전에 뿌리를 뽑아야 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정치권에서 이 시급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역량을 가진 리더십은 보이지 않는다. 여당, 야당 모두 n번방 사태를 기계적으로 규탄하고 있을 뿐 뚜렷한 근절 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사이버 조폭을 상대로 범죄와의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역량을 가진 정치인의 탄생을 기대한다.

이경탁 기자(kt87@chosunb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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