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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4 (화)

[공감세상] 그 남자가 왜 초범이겠는가 / 이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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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이라영 ㅣ 예술사회학 연구자

어린이집에서 여아에 대한 남아의 ‘성 관련 가해’ 사건이 알려졌을 때 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은 “아이들의 발달 과정에서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모습일 수” 있다는 발언을 했다. 어린이집에 다니는 연령의 남아는 ‘그럴 수 있다’는 뜻이 된다. 엔(n)번방 방지법과 함께 딥페이크 관련 처벌을 논의한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서 김오수 법무부 차관은 “청소년이나 자라나는 사람들은 자기 컴퓨터에서 그런 짓 자주 한다”고 했다. 이제 남자 청소년들은 자라나는 과정에서 성착취물 정도는 소비할 수 있는 인간이 된다. 아동학대 사이트를 만든 손정우는 아동 성착취물을 22만여건 유통했지만 ‘반성하고 있으며, 초범이며, 부양가족이 있다’는 이유로 1년6개월 형을 받았다. ‘22만건의 초범’은 그렇게 이해받는다. 아동과 여성을 착취해서 돈을 번 성인 남성에게 다시 여성과 아동을 부양할 권력을 부여해준 끔찍한 판결이다. 가족을 부양하는 남성 가부장 모델이 실은 남성에게 어떻게 폭력을 용인하는지 잘 보여주는 사례다.

이처럼 성범죄에 대해서는 가해자 중심의 생애주기별 맞춤형 변명 서비스가 매뉴얼로 자리 잡았다. 스스로를 위로하기 위해서, 휴식을 취하기 위해서, 존재감을 느끼기 위해서, 친목을 위해서, 억눌린 화를 분출하기 위해서, 꺼져가는 자존감을 붙들기 위해서, 호기심 때문에, 심지어 예술을 위해, 이 모든 것을 위해 할 수 있는 거라곤 같은 인간 중에서 더 만만한 여성이나 아이들을 성적으로 지배하는 방법밖에 모르는 남성으로 자라난다. 여성들을 ‘노예’라 부르며 메뉴판 위의 음식처럼 차려 돈을 버는 ‘모범생’과 ‘아이티 꿈나무’는 그렇게 만들어진다.

지금 청소년들의 아버지 세대가 20년 전 여성 연예인의 비디오를 돌려보던 행동들이 더욱 진화하고 있을 뿐이다. 특정 연예인이 겪는 문제를 대수롭지 않게 처리하더니 이제는 불특정 다수의 여성과 아동이 성착취의 대상이 되었다. 폭력이 가까이 밀려오자 ‘충격’받으며 ‘우리는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한탄하는 모습도 솔직히 우습다. 과거에는 직접 여성의 몸을 사고팔았다면 이제는 디지털 세계에서 폭력을 무한 복제하며 비대면으로 수익을 올리는 ‘평범한’ 남성들이 무수히 증식 중이다.

여성 대상 범죄의 판결문에서 유난히 많이 발견하는 표현은 ‘죄질이 좋지 않지만 초범이고 반성하고 있으며’이다. 짜고 치는 고스톱. 그들이 왜 초범이겠는가. 걸리지 않도록 도와주는 문화니까 당연히 초범일 수밖에. 어쩌다 잡혀도 턱없이 낮은 양형은 ‘평범한’ 남성들이 범죄자로 무럭무럭 자라나도록 양분을 준다. 텔레그램은 보안이 강해서 잡기 힘들다, 잡아도 관련 법이 없어 처벌하기 힘들다, 처벌하더라도 집행유예가 될 수 있다, 실형을 받더라도 금방 나온다, 어차피 돈은 번다, 라고 소년들은 배우면서 자라난다. 남자라면 그럴 수 있다!

성폭력은 문화적으로 충분히 이해해주고 사법적으로 관대하며 나아가 경제적으로 수익을 만들어주는 폭력 ‘콘텐츠’이다. 그렇기에 행동하기를 주저하지 않고, 걸리더라도 단단한 남성연대로 저지선을 만들어 버틸 정도로 두려움 없이 뻔뻔하며 ‘이것도 다 지나가리라’ 믿으며 낄낄거린다. ‘성착취는 돈이 된다’는 걸 학습할 기회는 온 사방에 널렸지만 성착취가 범죄라는 인식은 접하기 어려운 사회다. 권력만 있다면 김학의처럼 얼굴이 다 나와도 무혐의가 된다. 정치적으로 ‘진보’라면 대놓고 성범죄를 옹호하진 않으나, 언제든지 공작의 희생양이 될 준비를 한다. 김어준씨는 또 ‘냄새를 맡으며’ 음모론을 내놓는다.

강간의 역사를 분석한 수전 브라운밀러는 <우리의 의지에 반하여>에서 “여성은 강간 피해자가 되도록 훈련받는다”고 했다. 여성은 ‘아름다운 피해자’가 되도록 꾸준히 권장받았다. 그러나 세상은 조금씩 변해왔다. 피해자가 되도록 훈련받아온 이 강간문화 속 여성들이 점차 고발자가 되어 말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이윤택도, 안희정도 감옥에 갔다. ‘엔번방에서 감방으로’ 갈 날도 오고야 만다.

▶[연속보도] n번방 성착취 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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