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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8 (일)

마스크 안 끼는 런던 위해···직접 만들어 나눔하는 韓디자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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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영국 런던에서 15년째 활동하고 있는 이정선 패션 디자이너. 지난해 말부터 일을 멈추고 재충전을 위한 안식년을 보내고 있었지만, 올해 코로나19 사태가 벌어지면서 직접 마스크를 만들어 기부하는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사진 이정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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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런던에서 활동하고 있는 이정선 패션 디자이너는 최근 옷 대신 마스크를 만드느라 바쁘다. 지난 3월 초부터 지금까지 그는 자신이 거주하는 아파트 주민, 인근 대형 마트와 편의점 직원·청소부 등에게 직접 만든 마스크 2000여 장을 무료로 나눠줬다. 옷을 만들고 남은 원단으로 겉감을 만들고 안엔 교체용 헤파필터를 덧댄 수제 마스크다. 이씨는 “영국에서 코로나19가 빠르게 퍼지고 있지만 마스크 착용의 필요성을 못 느끼는 사람들이 많아 작은 힘이라도 보태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정선 디자이너가 런던에서 활동한 지는 올해로 15년째다. 한국에서 대학을 졸업한 뒤 런던의 유명 패션학교 '센트럴 세인트 마틴'에서 의상디자인을 공부했고 이후 죽 런던에서 활동했다. 자신의 이름을 딴 여성복 브랜드 ‘재키 제이에스 리’(Jackie JS Lee)를 론칭하고, 3년 전부터는 남성복까지 영역을 확장했다. 이씨의 옷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편집숍 도버 스트리트 마켓, 일본의 이세탄 백화점, 한국의 편집매장 분더샵 등에 입점해 있다. 그의 남성복은 축구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활동할 때 친해진 박지성 선수가 홍보대사 겸 모델로 나서기도 했다.

지난해 11월 이씨는 재충전을 위한 1년간의 안식년을 선언하고 옷 만드는 일을 멈췄다. 그런데 올해 코로나19 확산으로 런던 사람들이 마스크를 쓰고 싶어도 구할 수 없게 되자, 직접 마스크를 만들어 동네 사람들에게 무료로 나눠주기 시작했다. 그의 마스크는 거주 지역인 이스트런던 해크니의 이름을 따서 ‘해크니 마스크’라고 불린다. 지난 6일 오후 전화 인터뷰를 통해 이씨의 마스크 나눔 활동에 대해 자세히 들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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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마스크에 안에 들어갈 필터를 재단하고 있는 이정선 패션 디자이너. 사진 이정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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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 무료 마스크를 제작하게 된 계기는.

A :

“집 앞 슈퍼마켓 직원들에게 '왜 마스크를 안 쓰냐' 묻자 '회사에서 마스크를 제공하지 않고, 구하고 싶어도 못 구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마스크 제작을 결심했다. 내가 거주하는 아파트 주민과 친구들이 마스크를 모두 착용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제작 수량을 늘려 나눔을 시작했다. 마스크 착용은 나의 건강을 지키는 것뿐 아니라 상대방에 대한 배려도 있음을 알리는, 일종의 인식 개선 캠페인을 시작한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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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쇼를 위한 컬렉션 옷을 만들던 작업실에서 마스크를 만들고 있는 이정선 디자이너의 모습. 사진 이정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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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선 디자이너와의 런던 시절 친분으로 남성복 모델로 나선 축구선수 박지성. 사진 이정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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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혼자 천을 재단하고 직접 재봉틀을 돌려 마스크 12개를 만들었다. 여기에 교체용 필터를 3장씩 동봉해 아파트 우편함에 넣는 식으로 주민들에게 마스크를 나눠줬다. 다음엔 집 앞 마트와 편의점 직원들을 찾아가 마스크를 기부했다. 온종일 작업해도 하루에 혼자 만들 수 있는 최대 수량은 30개 정도. 그래도 이씨는 3월 초부터 지금까지 하루도 쉬지 않고 매일 마스크를 만들었다. 어떤 보상도 기대치 않고 선의로 시작한 일이지만, 부정적인 시선도 있었다고 한다.

Q : 좋은 일을 하는데 부정적인 시선이 있었다니.

A : “아파트 페이스북 공용 계정에 ‘마스크를 나눠준다’ 공지를 올렸더니 대부분은 ‘좋은 일 한다’ 좋아했지만, 20% 정도는 ‘인증도 안 받은 마스크를 만들어 공포심을 조성한다’고 비난하더라. 실망감이 컸지만 그날 밤 DM(다이렉트 메시지)으로 ‘몇 개 더 주면 안 되겠냐’는 20여 통의 문의가 들어왔다. 이후 3일을 꼬박 준비해 100개를 만들어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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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선 디자이너가 만든 '해크니 마스크'의 인스타그램. 게시물마다 "코로나19 확산을 멈추기 위해 행동을 취하자" 같은 캠페인 문구들을 넣어 마스크 착용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사진 인스타그램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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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마스크가 입소문이 나면서 여기저기서 구입 요청이 많아졌고, 이씨는 아예 마스크 대량 생산을 계획했다. 컬렉션 의상을 만들 때처럼 마스크를 생산할 수 있는 공장을 섭외하고, 제작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총 제작량의 20%를 판매하기로 전략을 짰다.

Q : 혼자 만들다가 공장에서 생산하니 부담이 줄었겠다.

A : "그렇지도 않다. 3월 중순 공장에 원단과 부자재를 모두 넘기고 4000개 제작을 의뢰했는데, 이틀 뒤 봉쇄령이 떨어졌다. 봉제 기술자들이 아무도 출근을 안 했다. 결국 집에서라도 일하겠다는 3명의 지원자를 받아 재봉틀을 각자의 집으로 옮겨다 줬다. 지금도 3일에 한 번씩 집집마다 일감을 가져다주고, 완성품을 수거하고 있다. 나 역시 그들과 똑같이 아침 일찍부터 저녁까지 재봉틀을 돌려 마스크를 만들고 있다."

Q : 무료로 주던 마스크를 판매한다고 했을 때 반발은 없었나.

A : "제작 비용을 충당할 정도로만 수량을 제한해 판매하고 있다. 가격은 2개 한 세트가 6파운드(한화 8950원)다. 천 마스크를 매일 세탁해서 쓰려면 동시에 2개는 갖고 있어야 하니까. 6파운드는 기부금 개념이다. 지금까지 300장 정도 판매했는데 모두 기부용 마스크를 만드는데 쓰였다. 지금은 아예 브랜드화해서 더 적극적으로 판매와 캠페인을 촉진하고 있다. 덕분에 마스크 구매와 상관없이 기부금을 전달하는 사람들도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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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함께 거주한 동네 사람들에게 나눠주기 위해 마스크를 직접 만들고 있는 이정선 디자이너. 사진 이정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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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선 디자이너가 직접 만든 마스크. 그의 마스크는 현재 런던에서 '해크니 마스크'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마스크 착용 캠페인을 촉진하고 있다. 사진 이정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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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씨의 이런 마스크 나눔 활동엔 런던에서 함께 일해온 패션업계 친구들이 동참했다. 패션 컨설턴트, 사진작가, 영상감독 등 3명의 친구가 주축이 됐다. 이씨가 마스크를 만들면 어떤 친구는 포장과 배송을 맡고, 또 어떤 친구들은 SNS 계정에 올릴 캠페인 이미지와 영상을 만들었다.

이정선씨의 활약에 이어, 지금은 영국패션협회도 적극적으로 마스크 제작에 나섰다. 20여 명의 패션 디자이너가 모여 의료진을 위한 마스크 재료를 모아 다음주부터 제작에 들어갈 예정이라고 한다. 패션 전시와 행사가 주로 열리는 '빅토리아 앤 알버트 뮤지엄', 글로벌 온라인 패션 쇼핑 플랫폼 '매치스닷컴'도 힘을 보탠다고 한다.

Q : 마스크 제작은 언제까지 할 계획인가.

A : "코로나19 사태가 안정될 때까지 계속할 생각이다. 문제는 재료 수급이다. 디자이너 친구들이 자신의 스튜디오에 있는 원단을 쓰라고 기부를 많이 해줬지만, 함께 동봉해야 할 헤파필터를 모으는 일은 쉽지가 않다. 앞으로 얼마나 마스크를 제작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할 수 있는 한 열심히 재봉틀을 돌릴 생각이다.”

윤경희 기자 anni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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