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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2 (일)

[왜냐면] n번방은 투표로 사라진다 / 국회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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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원한다고 다 법 만듭니까?”

국회청원 성립 제1호 엔(n)번방 안건이 처리된 법제사법위원회(이하 법사위) 제1소위원회에서 김도읍 미래통합당 의원(부산 북구강서구을)이 한 말이다. 국민적 지탄이 이어지자 김 의원은 “사실이 아닌 주장이 확산되고 있다” “법의 난맥상을 방지하기 위해 질의한 것이다”라며 반박 입장을 냈다. 그러나 “청원한다고 다 법 만듭니까?”에서 현행법을 잘 활용해 엔번방 안건을 신속히 처리하겠다는 의지를 찾기는 어렵다. 대신 뚜렷이 보이는 것은 10만명이나 모여야 하는 온라인 청원 말고는 발언 창구가 없는 소외된 국민에 대한 업신여김, 국회 의사시스템 위에 군림해온 법사위 제1야당 간사의 오만 그리고 엔번방 사건의 심각성을 짚어내지 못한 법사위의 인식 지체다.

딥페이크를 “일기장에 혼자 그림 그리는 것”이라 비유해 물의를 빚은 여당 간사 송기헌 더불어민주당 의원(강원 원주시을)도 ‘졸속처리는 사실이 아니다. 청원 내용 중 법사위 회부 내용은 적절히 처리했다’는 입장문을 냈다. 추레한 변명이다. 법사위는 엔번방 사건을 잘 몰랐고, 역할을 다하지도 않았다. 엔번방 사건 청원 요지를 본문에 적힌 요구사항 3가지로만 좁게 해석하고 조직별로 소관을 나눌 궁리만 했다. 또한 엔번방 사건을 신종 음란물 유포 문제 정도로 대상화하고 비슷한 ‘느낌’으로 생소한 디지털성범죄인 딥페이크와 잘못 연결해 관련법 보완 논의만 하다 청원을 종결지었다.

졸속처리의 숨은 주역도 소개한다. 바로 법사위 공무원 최고위직인 ‘전문위원’이다. 이들이 엔번방 사건 청원과 딥페이크 관련 보완법을 묶어 심사자료를 만들었다. 그 잘못된 자료를 보면서 코로나와 총선으로 마음 급한 의원들이 엔번방 사건 청원을 졸속처리했다. 회의장의 유일한 여성인 백혜련 민주당 의원, 유일하게 50대 이상이 아닌 채이배 민생당 의원만 엔번방 사건이 무엇인지 파악하고 있었다. 만일 논의 주체가 다양한 성별과 세대로 구성됐더라면 청원 심사 결과는 조금 달랐을지도 모른다.

어떻게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진 걸까? 법사위의 특별한 지위 때문이다. 법사위는 국회에서 발의된 모든 법안을 최종 심사해 본회의 상정을 결정짓는 일을 한다. 별칭은 ‘상원’이다. 타 상임위 소관 법안은 각 상임위에서 심사를 마친 후 법사위에서 한번 더 심사되지만, 법사위 소관은 법사위 안에서 종결된다. 공청과 의제 숙성의 ‘안전장치’ 없이 위원 개인의 단편적 경험과 지식에 의존해 안건 의의를 훼손한 채 의결해도 되돌리기 어렵다. 그런데도 이런 시스템이 존속하는 이유는 국회가 법사위의 폐쇄성을 국민의 눈을 피할 밀실로 활용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구성원 한명 한명의 자질이 국회 전체의 자질로 바로 연결되기에 법사위는 그 어느 상임위보다도 성별, 세대, 가치가 다양한 위원들로 구성되어야 한다. 그러나 현재 법사위 위원 18명 중 여성은 단 3명, 평균연령은 58.4살이다. 상임위를 주도하는 위원장과 간사 2명, 전문위원 4명도 모두 남성이다. 엔번방 사건 청원 졸속처리 사태는 어쩌다 일어난 일이 아니다. 50대 후반 남성 기득권이 주도하는 법사위는 꾸준히 정치적 발언권이 제한된 여성을 비롯한 사회적 약자의 권익 보호에 무관심했고, 새로운 가치관과 기술에 무지한 모습을 보여줬다. 물론 법사위만의 문제는 아니다. 현재 국회 20개 상임위 및 특별위를 통틀어 여성 위원장은 단 3명, 간사위원 28명 중 여성은 단 4명, 전문위원 39명 중 여성 또한 4명이다. 국회의원의 의정활동을 실질적으로 주관하는 보좌관은 전체 591명 중 단 8.3%만 여성이다(2020년 3월 기준). 이제껏 숱한 ‘신종 성범죄’ 관련 법안이 제대로 통과되지 못한 배경이다.

10일부터 21대 총선 사전투표가 시작된다. 엔번방 청원 졸속처리 같은 사태의 재발을 저지하기 위해선 더 많은 여성과 청년, 사회적 소수자가 국회에 진입해야 한다. 이번 선거에서 이들의 손을 꼭 잡아주시기를 부탁드린다. 그 손이 언젠가 철벽처럼 보이는 국회의 기득권을 부수고, 진정한 민의의 전당을 세울 것이다.

국회페미 총대 ㅣ 국회 페미니스트 여성 근로자 모임 ‘국회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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