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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1 (토)

[왜냐면] 대학을 거부한 국회의원을 찾습니다 / 윤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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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윤서(필명) ㅣ 대학입시거부로 삶을 바꾸는 투명가방끈 활동가

이번 총선의 비례대표 투표용지가 화제가 되었다. 50㎝에 가까운 길이 때문이다. 하지만 용지보다도 더 긴 것이 있다. 바로 후보자들의 ‘가방끈’이다. 실은 가방끈은 늘 길었지만 말이다. 선거운동이 한창인 요즘, 보여줄 만한 학력을 가진 사람은 선거 홍보물 등에 큼지막하게 출신 학교를 기재한다. 정치에서조차도 여태껏 학력은 그가 얼마나 성실했는지, 능력과 자질을 갖췄는지 알려주는 요소가 되어왔다.

‘대학입시거부로 삶을 바꾸는 투명가방끈’(투명가방끈)은 2011년부터 경쟁교육과 학력·학벌 차별을 반대하며 ‘대학입시 거부 선언’을 해왔다. 19살, 고3 학생, 청소년과 청년들은 수능날 모여 나를 거부하는 교육을 거부하겠다고 외쳤다. 투명가방끈 이전에도 ‘학벌없는 사회’ 등 여러 시민사회단체들이 한국 사회의 학력·학벌 차별 문제를 비판하고 변화를 촉구했다. 하지만 학력에 따른 차별, 소위 ‘명문대’ 중심의 독식은 바뀌지 않고 있다. 비판의 목소리는 오히려 예전보다 더 들리지 않는 것 같다.

20대 국회의원은 300명 중 294명이 대졸자다. 과반이 이른바 명문대 출신이다. 21대 국회에서도 별다른 변화는 없을 것 같다. 총선에 출마한 총 1116명의 후보자 중 대졸 이상 학력은 989명이었고(88.6%) 서울대 출신은 130명이다. 고학력자만 정치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국회에서 ‘동문회’ 하는 사람이 왜 이렇게 많을까?

당선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높은 원내정당으로 좁혀보면 더 심하다. <중앙일보> 통계에 따르면, 더불어민주당의 지역구 출마자 253명 중 99%, 미래통합당 지역구 출마자 237명 중 98%가 대졸 이상이다. 나머지 당도 비슷하다. 학력 장벽에서는 정치색도 진영도 큰 차이가 없다.

국민을 대표하는 국회의원 자리를 차지하는 이는 변함없이 50대·남성·대졸자이며, 그중 다수는 ‘인서울 주요 대학’ 출신이거나 유학 경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한 기득권 집단이 지나치게 과대 대표되어 있는 것이다. 늘 찢어졌다 붙었다를 반복하는 게 정치인 줄 알았더니 놀랍도록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국회의원이나 정부 고위 공무원들이 이렇게까지 편중되어 있으니 정책도 편향적일 수밖에 없다. 그들 다수에게선 학력·학벌 차별을 없애거나 대학서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절박함도 찾아보기 어렵다. 이런 정치권에서 이야기하는 ‘청년’이란 대개 ‘인서울’ 대학 재학생·졸업생들이다. 고졸 이하 학력의 사람들, ‘투명가방끈’들의 문제는 ‘청년 문제’로도 잘 다루어지지 않고, 가려지게 된다. ‘고학력 엘리트’가 아닌 사람들의 목소리는 정치에서 작기만 하다.

대졸 이상 학력, 소위 ‘명문대’ 출신 정치인들이 다수이다 보니 학력·학벌은 특별한 게 아닌 ‘기본’처럼 보인다. 하지만 어째서 대졸 학력이 정치의 필수 조건이란 말인가? 누구나 정치에 참여할 수 있다고 말하는 민주주의지만 사실상 학력 계급이 존재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우리는 대학거부자를 대표할 정치인을 원한다. 대학 문을 넘어선 정치를 원한다. 고학력자가 아니라도, 소위 ‘명문대’를 나오지 않더라도 당당하게 국회의원이 될 수 있는 사회를 원한다. 누군가에게 맞춰진 사회가 아니라 누구나 나와 맞는 사회를 만들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사회를 원한다. 그런 사회는 당연히 없다고 손사래 치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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