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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2 (일)

[문화와 삶]영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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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LG 셰이커스의 강을준 감독은 강한 경상도 억양과 직설적인 화법으로 “니갱망(니가 갱기(경기)를 망치고 있어)” “헤이~ 쌰랍!” “니들이 스타야?” 같은 수많은 어록을 남겼다. 그는 경기 중간 긴박한 작전타임에도 선수들을 앞에 두고 강렬한 말 한마디를 꼭 하는 감독이었고 그런 모습은 농구팬들 사이에서 컬트적인 인기를 누렸다. 그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말이 있다. “우리는 영웅이 필요 없어! 승리할 때 영웅이 나타나!”이다.

경향신문

요즘 영웅이란 말을 자주 듣는다. 35%의 시청률을 기록한 화제의 경연 프로그램 <미스터 트롯> 우승자 이름이 임영웅이었고, NCT 127이 최근에 낸 노래의 제목 또한 ‘영웅(Kick it)’이었으며 쏟아지는 속보 속 사투를 펼치는 의료진을 향해 모든 사람이 입을 모아 영웅이라 부르고 있다. 그리고 나에게도 ‘추적단 불꽃’이라는 새로운 영웅이 생겼다. ‘n번방 사건’을 집요하게 파헤쳐 결국 수면 위로 올리고 성범죄 집단 검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그들은 조주빈이 검거되기 전까지 세상에 자신들의 존재를 알리지 않았다. 진정한 영웅은 모든 것이 해결된 뒤 저절로 등장한다는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1992년 첫 방송된 <그것이 알고 싶다>는 한국에서 가장 저명하고 오래된 시사 프로그램이다. 문제적 사회 이슈에 대한 과감한 접근과 용감한 취재, 각계 전문가들의 자문을 통한 다층적인 분석, 책임감 있는 보도와 새로운 대안의 모색까지 튼튼한 구조의 에피소드들이 매주 방송된다. 거기에 매회 시청자들의 흥미를 유발하는 서스펜스 가득한 연출과 남성 진행자들의 연극적인 모놀로그가 더해져 30년 가까이 한결같은 포맷을 유지하면서도 시청자들에게 사랑과 신뢰를 받는 장수 프로그램으로 자리하고 있다.

그런데 지난가을 화성연쇄살인사건의 진범 이춘재를 다룬 <그것이 알고 싶다>의 에피소드 ‘악마의 시그니처’를 시작으로 나는 이 방송을 더 이상 전과 같은 마음으로 애청하지 못하고 있다. 피해 정황을 생생하게 되짚는 진행자의 이성적이고 차분한 목소리는 서스펜스보다는 위화감이 느껴졌고, 범죄자를 ‘악마’로 규정한 뒤, 그의 생애와 주변을 신비롭게 추적하고, 살인수법을 낱낱이 분석하는 결말은 시청 이후에도 꽤 오랜 시간 동안 불쾌한 기억으로 남았기 때문이다. 최근 방영된 ‘벗방 카르텔’ 편에서는 해당 불법 행위의 가담자를 제보자로 등장시켰고, ‘n번방 사건’ 편에서는 검거된 범죄자를 ‘괴물’로 표현하며 가해자와 피해자가 뚜렷하게 존재하는 사건을 탐사의 관점으로 보도하기도 했다. 그 에피소드에서 가장 잊을 수 없었던 장면은 ‘벗방’의 장소를 세트로 구현하고 그 안에서 마치 쇼를 하듯 피해자가 존재하는 화면 너머의 커튼을 열어젖히는 진행자의 불필요한 퍼포먼스였다. 사안의 심각성을 위협하고 실제로 존재하는 피해자들이 소재로만 이용된다는 생각을 갖기에 충분했다.

여성들의 공론화가 없었다면 범죄로 인식조차 되지 못했을 ‘n번방 사건’을 통해 각 언론사는 저마다 피해자 중심의 새로운 보도원칙을 만들어 실행 중이다. 가해자 개인에 대한 자극적 보도와 사건에 대한 불필요한 서술을 지양해 2차 가해를 경계하고, 피해자들을 향한 연대 및 사회적인 위로를 촉구하며 디지털 성범죄의 근본적인 근절을 위한 기획 보도 또한 쏟아진다. 실제로 일어난 범죄 사실을 다룬다면 피해자의 관점에서 범죄를 해석하고 그들이 이 사회에 다시 정착할 수 있도록 여론의 기반을 만들어줘야 한다는 당연한 합의가 지금의 흐름대로 꾸준히 정착되길 희망한다. 세상에는 극적인 반전과 스릴, 영웅의 화려한 활약이 필요 없는 사건들이 존재한다. 사람들은 이제 자극적이고 흥미로운 기법을 따르지 않아도 분노하고, 연대하는 타이밍과 방법을 만들어가고 있다.

복길 | 자유기고가·<아무튼 예능>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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