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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6 (월)

[직설]이 절박한 분노에 공감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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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적으로 엄벌주의에 반대하지만, 성착취 범죄에 대해서는 좀 더 무거운 형량 부과가 필요하다는 주장을 이 지면에 쓴 적 있다. 형량이 낮아서 생기는 사회적 부작용이 크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2018년 여름이었다. 불법촬영물 유포자와 웹하드 업체, 심지어 영상물 삭제 업체까지 공생 관계로 엮여 있었다는 충격적인 내용의 탐사보도 프로그램이 방영된 뒤였다. 덕분에 디지털 성착취 산업의 면면이 널리 알려졌다.

경향신문

무지해서 저지른 잘못에 대해, 혹은 사회와 문화에서 익힌 것을 무비판적으로 답습한 죄악에 대해 개인에게 지나친 책임을 지우는 것은 부당하다고 여전히 생각한다. 하지만 이제 성착취 범죄는 여기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본다. 화제를 모은 방송프로그램들, 포털사이트 메인 화면을 장식하며 사회적 공분을 일으킨 숱한 기사들, 관련 문제를 다룬 스테디셀러 서적들을 생각해보자. 그것의 비윤리성을 학습할 기회는 차고 넘쳤다. 한사코 귀 막으며 배울 기회를 거부해 온 개인은 스스로의 선택에 책임져야 한다.

이 때문에 텔레그램의 성착취 범죄방 운영자뿐만 아니라 돈을 내고 ‘즐긴’ 사람들 모두 엄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관련 기사를 접했을 때, 내용의 참혹성으로 내 안의 무언가가 훼손된 느낌이었다. 그 뒤 소셜미디어에서 ‘한강 5부제’라는 ‘패드립(패륜적 농담)’을 봐도 눈살 찌푸리지 않게 되었다. n번방의 소비자들은 살아있을 가치가 없으니 한강에 뛰어들어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편을 추천하는데, 가급적 수질오염이 덜 되게 공적마스크 판매시스템처럼 생년에 따라 요일별로 나눠 뛰어들면 좋겠다는 누군가의 아이디어였다. 죽음을 소재로 한 농담에도 죄의식이나 불편을 느끼는 본능이 정지한 까닭은, 분노가 온몸을 장악한 것일 테다.

이 분노에 공감하지 못한 사람들을 볼 때 분노는 더욱 커졌다. 방어적 태도를 앞세우는 일부 남성들이다. 크게 두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 적은 숫자에 집착하는 유형. 텔레그램 성착취방 이용자수로 흔히 추산되는 26만은 절대 가능하지 않고, 1만 정도일 거라는 주장을 되게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들. 한국남자 중 ‘그런’ 녀석들이 많지 않음을 입증하고픈 욕망이 다른 무엇보다 앞서는 듯 보였다. 하지만 스스로가 (굳이) 그런 범죄자들과 다르다는 걸 드러내고 싶다면 숫자를 축소하는 데에만 집착하는 태도를 갖지 않는 편이 나을 텐데. 공감능력이 부족해 보이고 굉장히 수상쩍거든.

둘째로, 피해자 가운데 ‘일탈계’나 돈을 바라고 덫에 걸려든 경우는 ‘무고한’ 피해자가 아니라고 웅얼대는 유형이다. 시작이 그러면, 협박과 강간이라는 범죄에 대한 피해가 없던 일이 되나? 돈과 선물이라는 미끼로 유입된 청소년 피해자가 많다는 사실은 오히려 범죄의 악랄함을 방증하는 것 아냐? 역시나 공감능력 부족해 보이고 굉장히 수상쩍다.

정서적·경제적으로 취약한 환경에 처한 여성 청소년에게 나쁜 손길을 뻗은 어른들을 생각하면 화를 참을 수 없다. 그리고 기사에 공개된 조주빈의 문자들. 그 현란한 가스라이팅(타인을 조종하는 정신적 학대) 기술은 어른인 내가 봐도 숨이 막히는데, 청소년 피해자들은 얼마나 두려움에 떨었을까.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이쯤 되면 경이롭다. 사건에 대한 분노와 피해자에 대한 공감보다 자신이 속한(다고 믿는) 집단의 방어가 앞서는 사람들이.

나는 피해자의 회복과 우리 사회의 유구한 성착취 문화 근절이 무엇보다 시급하고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하고, 문화가 바뀌기 위해서는 성범죄의 양형기준이 강화돼야 한다는 데 동의한다. 디지털 성착취 범죄에 대한 문제제기가 계속됐음에도 솜방망이 처벌은 계속됐고 그 결과가 이것이다. 웹하드에서 텔레그램으로, 범죄 내용은 좀 더 끔찍하게. ‘유출’ 동영상을 좋아한다는 ‘취향’을 밝히며 공유를 부탁하는 문화도, 여성을 인간으로 보지 않는 ‘일부’ 남자들의 시선과 성범죄자에게 관대한 관습도, 제발 지금부터라도, 제발.

최서윤 |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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