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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8 (일)

[설왕설래] ‘무수저’ 최재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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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일보

아비는 노비였고 어미는 기생이었다. 시쳇말로 그의 입에는 그 흔한 흙수저조차 없었다. 가장 밑바닥 인생에서 출발했지만 그는 누구보다 고귀한 삶을 살았다. 단 하나뿐인 목숨을 조국의 광복을 위해 썼다. 그제 순국 100년을 맞은 독립운동가 최재형 선생의 얘기다.

함경북도 경원에서 태어난 선생은 아홉 살 되던 해에 부모를 따라 러시아 연해주로 이주했다. 지겨운 가난은 거기까지 따라왔다. 굶주림에 지친 소년은 가출했다가 바닷가에 탈진해 쓰러졌다. 평생의 은인인 선장 부부를 만난 것은 그때였다. 그는 선장 부부의 배려로 근대 교육을 접할 수 있었다. 그후 군납으로 엄청난 재산을 모았고 높은 관직에도 올랐다.

그의 진짜 인생은 이제 시작이었다. 그는 자신에게 천민의 굴레를 씌웠던 조국을 위해 모든 것을 내놓았다. 신문을 펴내 항일운동을 전개하고 독립군을 조직했다. 민족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하는 계획을 짰다. 안중근 의사는 그가 사준 권총으로 그의 집에서 사격 연습을 했다. 안 의사가 독립투쟁의 일념으로 넷째손가락을 자른 곳도 그의 집이었다. 하얼빈 거사가 끝난 후엔 안 의사 가족들을 보살폈다. 선생은 한인들을 위해 학교를 세우고 봉급까지 털어 인재를 키웠다. 한인들은 그를 ‘최 페치카’로 불렀다. 사람의 마음을 데우는 난로 같은 존재라는 의미였다.

선생은 최후의 죽음까지 아름다웠다. 1920년 4월 일본군이 집으로 쳐들어오자 가족들은 그에게 뒷문으로 피신하라고 애원했다. “내가 숨는다면 일본군이 너희들에게 잔인하게 복수할 게 아니냐.” 그는 앞문을 열고 일본군의 총칼을 향해 당당히 걸어갔다.

한때 흙수저, 헬조선 따위의 말이 유행병처럼 나돌았다. 흙수저라고 자신의 처지를 비관 말라. 최재형은 ‘무(無)수저’였다. 조국이 무엇을 해주지 않는다고 헬조선이라 부르지 말라. 최재형은 자신을 멸시했던 망국 조선에 기꺼이 목숨을 바쳤다. 3·1운동 때에도 기생, 백정 등 수많은 무수저들이 들불처럼 일어났다. 대한민국은 그런 숭고한 피가 흐르는 나라다. 곧 4·15총선이다. 그러한 마음으로 투표에 임한다면 당신의 한 표는 가볍지 않을 것이다.

배연국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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