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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8 (화)

[김선영의 드라마토피아]‘부부의 세계’ 지선우, 또 하나의 모나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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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드라마 <부부의 세계>에서 지선우(김희애 분)는 남편(박해준 분)의 외도를 뒤늦게 깨달은 상처받은 비련의 아내로 머물지 않는다. 복수의 화신으로 변하면서, 모든 행위를 주도하는 캐릭터로서 비련에 빠진 아내의 전형을 해체한다. 이는 한국 드라마 안에서 기혼 여성 캐릭터를 다루는 범위를 더 넓힌 것이다. JTBC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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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드라마계에서 제일 눈에 띄는 현상은 여성 캐릭터의 다양화다. 1990년대, 기존 한국 드라마의 관습을 뒤바꾼 트렌디 드라마가 비로소 가정과 분리된 사회적 존재로서 여성을 그려낸 이래로, 가장 큰 변화라 할 만하다. 전통적 여성상에서 벗어난 캐릭터들이 ‘당당하고 주체적인 여성상’이라는 또 하나의 스테레오타입에 갇힌 한계마저 극복하려는 새로운 경향이다. 가령 현재 방영 중인 SBS 드라마 <하이에나>는 그 최전선에 있는 작품이다. ‘도덕적으로 그리 떳떳하지 못하고 성공의 욕망에 지배된’ 정금자(김혜수)는 전형적인 여주인공의 ‘미덕’에서 벗어나 있지만, 그 덕에 오히려 흥미롭고 입체적인 캐릭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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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눈여겨봐야 할 지점은 기혼 여성 캐릭터의 변화다. 그동안의 여성 캐릭터 진화가 상대적으로 가정의 구속에서 자유로운 싱글 여성 캐릭터 위주로 전개됐다면, 가장 보수적인 기혼 여성 캐릭터 묘사에서도 서서히 같은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대표적 사례가 2016년 방영된 tvN <굿와이프>다. 동명의 미국드라마를 리메이크한 이 작품의 주인공 김혜경(전도연)은 ‘배신당한 아내’라는 통속극 속 전형적인 여성 캐릭터로 처음 등장해 어느덧 남편의 수완을 훌쩍 뛰어넘는 정치적 인물로 성장해간다. 이 과정에서 선과 악의 경계를 해체하면서 ‘착한(good)’ 여주인공의 덕목과도 멀어진다. ‘TV의 새로운 여성 캐릭터를 창조했다’고 평가받은 원작 캐릭터 재현의 성취를 그대로 이어받은 입체적인 캐릭터다.

JTBC <부부의 세계>는 여기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간 묘사를 보여준다. 이 작품 역시 영미권 드라마인 2015년 BBC 방영작 <닥터 포스터>를 리메이크했다. 주인공 지선우(김희애)는 김혜경과 마찬가지로 전형적인 ‘굿와이프’로서 처음 모습을 드러낸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유능한 전문직 여성이자 아내와 엄마의 역할까지 완벽하게 수행하고 있다. 반면 이태오(박해준)는 ‘완벽한’ 아내를 속이고 젊은 여성과 외도를 즐기는 배덕한 남편일 뿐 아니라, 아들의 미래를 위한 보험금까지 빼돌린 무책임한 아빠다. 드라마는 이처럼 지선우에게, 시청자들의 연민과 호감을 사기에 더할 나위 없는 시련의 여주인공 조건을 모두 부여하고 이야기를 시작한다.

하지만 지선우는 마냥 상처받는 비련의 아내 역할에 머물지 않는다. 첫 회에 남편과 친구들의 배신을 깨달은 선우는 곧 분노와 복수의 화신으로 돌변한다. 지역민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던 의사에서, 환자 현서(심은우)에게 수면제 처방과 남편의 미행 거래를 제안하는 부도덕한 인물이 된다. 데이트폭력으로 고통당하는 현서를 구해주면서 멋진 여성상을 회복하기도 하나, 다시 그녀에게 남편의 애인을 감시하게 함으로써 불편함을 유발한다. 기존 통속 드라마 속 ‘비련의 아내’와의 결정적 차이는 소위 ‘맞바람’ 장면에서 드러난다. 선우가 이웃집 동생 예림(박선영)의 남편이자 태오의 친구 제혁(김영민)과 하룻밤 정사를 나누는 데에는 복잡한 계기가 있다. 태오와 예림의 배신에 대한 복수이자, 이혼에 필요한 정보를 입수하기 위한 전략적 행위다. 무엇보다 이는 욕망에 따른 행동이다. “본능은 남자에게만 있는 게 아니”라며 행위를 주도하는 선우의 모습은 비련에 빠진 아내의 전형을 과감하게 해체한다.

<부부의 세계> 원작은 에우리피데스의 그리스 비극 <메데이아>에서 모티브를 가져왔다. 원작자는 ‘마녀와 악녀’의 아이콘인 메데이아의 분노에 심리적 해석을 가한 에우리피데스의 정신을 이어받으면서, 여성의 분노를 광기로 몰아가는 여성혐오적 인식을 뒤집는다. 똑똑한 의사 제마 포스터가 남편의 외도 때문에 자기파괴적 분노로 치달아가는 모습을 두고 현지에서 벌어진 뜨거운 논란에도 이러한 혐오가 반영되어 있다. 하지만 제마 포스터와 지선우는 단순히 남편에게 배신당한 것을 넘어 믿었던 세상 전부로부터 기만당한 여성이다. “지옥, 지옥이구나… 증오로 바뀐 사랑만 한 분노는 천국에 없으며, 멸시받은 여인의 분노 또한 지옥에조차 없으리.” 원작에 인용된 시처럼, 선악의 평가를 떠나 여성의 분노 자체를 이토록 밑바닥까지 깊숙이 들여다보는 드라마는 흔치 않다.

지금까지 드라마 속에서 남성 캐릭터들은 최악의 연쇄살인범일지라도 그 심리에 대해 과잉에 가까운 해석을 부여받았다. 이제는 여성 캐릭터에도 이러한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 미국에서 <굿와이프>가 ‘현대적 페미니즘을 혁명적으로 보여주었다’고 평가받은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전형적인 페미니스트 영웅’이 아니기에 더 흥미로운 주인공은 ‘TV 여성 캐릭터 르네상스의 도래를 상징하는 모나리자’로 호평받았다.

한국 기혼 여성 캐릭터 표현의 범위를 넓힌 지선우 역시 또 하나의 ‘모나리자’로 기억될 만하다.

김선영 | TV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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