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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4 (화)

[매경의 창] 다시 혁명의 원점을 돌아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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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갑오개혁의 일환으로 1895년에 한성재판소(漢城裁判所)가 개설됨으로써 우리나라에 근대적 재판제도가 처음 도입되었다. 그 이후로 우리의 생각과 행동의 규준에 결정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이는 식민지 기간은 별도로 하더라도 그전의 백 년과 비교하여 보면 바로 알 수 있다. 왕을 정점으로 하여 양반만이 특권을 누리던 신분제 사회는 무너졌다. 그리고 이 체제를 설명하고 정당화하던 유교 이데올로기도 정통성을 상실하였다. 이제는 각 개인이 골고루 가지고 누리는 자유와 권리가 사회 구성의 출발점이 되었다. 모든 정치적 권력은 국민의 의사에서 나오고 정권은 단지 국민으로부터 일시적으로 이를 위탁받은 데 불과하다. 이러한 근본원리의 전면적인 변화는 그 자체로 가히 혁명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혁명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의식하고 있는가?

1945년 8월에 식민지 지배로부터 벗어나서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였던 즈음이야말로 혁명이 실제로 열매를 맺어야 할 때였다. 그러나 아쉽게도 광복 직후의 이데올로기 대립과 국토의 분단, 바로 이어진 동족상잔의 전쟁, 그리고 생활의 빈궁과 고난 등으로 해서, 이 나라의 '새로움'은 생존을 둘러싼 싸움의 열기에 묻혀 버리고 말았다. 무엇보다도 식민지의 경험이 우리의 자존심에 입힌 상처는 심각한 것이어서, 이를 달래기 위해서라도 일단 우리의 고유성 또는 주체성에 집착하는 경향이 생겼다. '찬란한 문화를 낳은 민족'의 우수성 또는 '반만년의 유구한 역사'의 연속성은 강조하면서도, 과거를 떨쳐 버리고 새 출발을 하여야 하는 역사의 비연속면(非連續面), 말하자면 근대적 정신의 수련과 제도의 내면화에 대한 감수성은 무디어지지 않았던가?

이로써 신생(新生)의 나라에 어울리는 '새로운 사람'의 추구는 어느덧 빛을 잃고 누구도 주목하고 강조하지 않게 되었다. 혁명의 시대에는 반드시 새로운 윤리와 책임의식을 갖춘 혁명적 인간성이 제시되고, 그 실현을 위하여 교육과 프로파간다와 강제가 행하여지는 법이다. 그러나 우리는 최근까지도 민주사회의 시민이라는 이름에 값하는 인간 모델의 형성과 실현에 별로 주목하지 못하였던 것이 아닐까? 우리는 장 자크 루소도, 존 스튜어트 밀도, 그나마 후쿠자와 유키치도 가지지 못했다.

대한민국의 건립으로 시작된 그 혁명이 달성하고자 하는 목표, 혁명의 이념을 단적으로 선언하는 것이 바로 제헌헌법이다. 그것은 그 제1장 '총강(總綱)' 중의 제5조에서 "대한민국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각인(各人)의 자유, 평등과 창의를 존중하고 보장하며 공공복리의 향상을 위하여 이를 보호하고 조정하는 의무를 진다"라고 표현되어 있다.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는 현행 헌법 제10조도 마찬가지다. 우리 헌법은 역사의 관점에서 보면 혁명공약과도 같은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생각이나 행동은 그렇게 쉽게 변하지 않는다. 우리는 독립된 개인을 좌표의 원점으로 삼지 않고, 여전히 사람을 무엇보다도 어느 집안, 어느 기업 기타 단체, 또 나라의 구성원 또는 부품으로 본다. 멸사봉공(滅私奉公)이 여전히 불가침의 덕목이다. 관계가 개인보다 앞선다. 그래서 우리는 남의 간절한 희망을 그 내용이 어떠한 것이든 들어주는 것을 '사람이 좋다'고 하고, 법과 같은 객관적 규범을 그대로 밀고나가는 사람은 냉혹하다고 한다. 그러니 청탁이라는 것이 넘쳐난다. 코로나19 사태로 하루하루가 답답하다. 이럴 때일수록 보다 근원적인 것에 다시 마음이 돌아가는 것이다.

[양창수 한양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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