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5.10 (금)

[책과 삶]똑똑하기만 한 ‘마법사’는 위험하다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은밀한 설계자들

클라이브 톰슨 지음·김의석 옮김

한빛비즈 | 656쪽 | 2만5000원

경향신문

거대 테크기업 경영자들은 흔히 ‘좌파 성향’으로 얘기되지만, 실제로는 간단치 않다. 이들은 ‘파괴적인 혁신 기술’이 사람들의 삶에 피해를 입힐 것을 알면서도 주저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보편적 의료보험이나 기본소득 등 분배 정책을 지지하고, 또 한편 사업에 장애가 되는 규제는 없기를 바란다. 경제적 독점을 하고 노동자를 탄압하면서도 공공 시설물을 기꺼이 기부한 19세기 자본가를 디지털시대에 옮겨 놓은 것과 비슷하다. 사진은 ‘페이스북’을 만든 마크 저커버그를 모델로 한 영화 <소셜네트워크>의 한 장면.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print("Hello, World!").

엔터키를 눌러 코드를 실행하면, 컴퓨터 모니터에 ‘Hello, World!(안녕, 세상아!)’라는 메시지가 나타난다. 1972년 젊은 컴퓨터 과학자 브라이언 커니핸이 프로그래밍 언어 매뉴얼에 처음 사용한 문구다. 병아리 한 마리가 껍질을 깨고 나오는 만화에서 영감을 얻은 이 인사말은 오늘날 250개가 넘는 모든 프로그래밍 언어 매뉴얼의 처음을 장식하는 ‘주문’이 됐다. 시작은 소박했지만, 프로그램은 세상을 마법처럼 바꿔놨다.

사람들은 카카오톡 메시지의 ‘1’이 사라지지 않으면 불안해하고, 다시 찾아보지도 않을 인증용 음식 사진을 스마트폰에 쌓는다. 손짓 몇 번이면 동네 맛집의 음식이 현관까지 배달되고, 바이러스의 대유행에도 실시간 감시 체계를 구축할 수 있었다. 온라인 메신저, SNS, 카메라 앱, 배달 앱 등 새로운 프로그램은 삶의 모습을 변화시키는 데 그치지 않고 우리 행동과 생각까지 지배한다.

컴퓨터에 미친 괴짜, 천재에서 어느 날 슈퍼히어로가 된 사람들

남들을 전혀 모른 채 남들의 삶을 좌지우지하는 프로그래머

‘고학력의 젊은 백인’ 저마다 성격과 능력은 달라도 얼굴은 똑같다

여성·흑인 등에 대한 편견·차별…탁월함이 부작용을 낳는 역설

남다른 기술이 올바른 현실을 만들도록…그들을 지켜보자


경향신문

<은밀한 설계자들>(원제 Coders)은 이러한 프로그램을 만드는 ‘프로그래머’에 대한 책이다. 너무 익숙한 이름이라 맥이 탁 풀렸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프로그래머가 어떠한 존재인지, 무슨 일을 하는지 의외로 아는 것이 없다. 기술과학 분야 저널리스트인 저자는 페이스북, 트위터, 인스타그램, 구글 등 유명 IT기업의 프로그래머들을 인터뷰하고, 다양한 자료들을 정리해 그들이 누구인지, 또한 세상을 어떻게 급진적으로 변화시키고 있는지 풀어놓는다.

“2006년 9월5일 이른 새벽, 루치 생비는 소프트웨어를 고쳐 세상을 바꿨다.” 여성 프로그래머 생비는 23세에 페이스북에 입사했다. 하버드대 출신 젊은 청년들로 구성된 이 회사에서 최초의 여성 소프트웨어 엔지니어였다. 그가 맡은 새로운 일은 ‘뉴스피드(News Feed)’. 페이스북에 로그인하면 마지막 접속 이후 친구들의 게시물이 한 페이지로 정리돼 나타나는 특화 기능이다.

하지만 모든 소식을 보려면 많은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중요한 것들을 골라내는 규칙이 필요했다. 2006년 여름 생비는 맞춤형으로 개인별 최신 뉴스를 보여주는 데 성공한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하루 만에 이용 시간이 2배 늘었고, 수많은 사용자를 끌어들였다. 하지만 스토커처럼 사생활을 ‘전체 공개’ 해버리면서 항의가 쏟아졌고, 급하게 개인정보보호 설정 기능을 추가해야 했다.

뉴스피드는 지난 20년간 나온 프로그램들 중 가장 영향력 있는 프로그램이라 할 수 있다. 우리 삶 전반에 영향을 미쳤고,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아랍의 봄’부터 적의에 찬 IS의 홍보 영상까지 다양한 일을 입소문 내는 데 가장 적합한 매체가 됐다. ‘TMI’(Too Much Information), ‘관종’(관심받기 좋아하는 사람) 등 다양한 심리학적 문제도 유발했다. 2016년 도널드 트럼프가 당선된 미국 대선에선 백인 우월주의자들이 피드를 이용해 정치적 소동을 일으키기도 했다. SNS가 사회의 분열과 고립을 만들어내는 데 이른 것이다. “소프트웨어는 이 세상을 서서히 먹어치우고 있다.”

경향신문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프로그래머는 잘 드러나지 않으면서도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이다. 과거에는 법률가나 입법가 혹은 도시공학자 등이 삶의 모습을 좌우했지만, 오늘날의 세상을 만드는 사람은 프로그래머다. 그들의 결정에 따라 우리의 삶도 달라지고 있다. 오늘날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선 “바로 프로그래머를 보고 그들을 이해해야 한다”.

책에선 프로그래머의 등장부터 현재까지를 입체적으로 그린다. 흔히 떠올리는 프로그래머는 대부분 백인 남성(그나마 아시아계가 조금 있다)이며, 컴퓨터에 미쳐 있는 ‘괴짜’의 모습을 하고 있다. 하지만 프로그래머의 모습 역시 시대에 따라 변해왔다. 1세대 프로그래머는 ‘여성의 일’로 여겨졌고, 직업으로는 생각되지 않았다. 1960~1970년대 2세대는 ‘해커’들이었다. 컴퓨터에 푹 빠진 사람들이 개방과 공유의 신념을 떠받들며 반상업적 성격을 띠었다.

1980년대 컴퓨터 가격이 내려가면서 10대부터 프로그래밍 세계에 발을 들이게 된 3세대를 지나 1990년대 중반 웹의 발전과 더불어 등장한 오늘날 4세대는 엄청난 부자가 되기도 하고, 막대한 사회적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실리콘밸리의 젊은 갑부들이다. “정말로 여러분이 속해 있는 사회를 바꾸고 싶다면 프로그래밍을 해라. 더 이상 사회에서 따돌림 당하는 괴짜 컴퓨터 전문가가 아니다. 오히려 일반 사람은 꿈도 꾸지 못할 강력한 힘을 휘두를 수 있는 슈퍼히어로들이다.”

책에선 ‘사회성이 떨어진다’ ‘효율성을 추구한다’ ‘엄청난 천재들이다’ 등등 프로그래머들의 이미지를 하나하나 짚어본다. 정말 독특하다.

이를테면 최적화를 극단적으로 추구한 제이슨 호라는 프로그래머는 일본 여행에서 가능한 한 많은 라멘 가게를 들르기 위해 최적 경로를 프로그래밍하고, 집을 구할 때도 대상 지역 정보들로 점수를 매겨 집의 장기적 가치를 계산하는 프로그램을 만들어 결정했다. 지인들에게 연락하는 게 귀찮아 ‘굿모닝’ ‘잘 지내고 있지?’ 같은 내용의 무작위 문자를 보내는 스크립트 프로그래밍을 만든 사람도 있고, 회사 주방에 있는 커피머신을 켜고 41초 후에 라테 한 잔을 마실 수 있도록 작동시키는 프로그램을 만든 사람도 있었다. ‘41초’는 책상에서 커피머신까지 가는 데 걸리는 시간이었다고 한다. ‘10X’(일반보다 10배 뛰어난 능력을 가진 프로그래머)라고 불리는 이들의 탁월한 능력에 경탄하면서도 결국 성공하기 위해선 함께 일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깨달음도 얻는다.

경향신문

마크 저커버그는 페이스북 개인정보 유출 문제로 2018년 4월 미국 의회 청문회 출석했다(왼쪽 ). 트위터의 공동 창업자 겸 최고경영자인 잭 도시. 신화·AP연합뉴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마다 이상한 성격과 능력을 가진 프로그래머들은 모두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 ‘고학력의 젊은 백인 남성’이다. ‘능력주의’로 포장한 이들만의 세상은 오늘날 수많은 부작용을 낳고 있다. 책에서 가장 강하게 비판하는 지점이 바로 프로그래머들의 남성중심문화다. 트위터는 왜 욕설과 괴롭힘에 특화된 매체가 됐을까. 표적이 된 사람에 대한 ‘조리돌림’이 빈번하게 일어난 이유가 트위터 디자인팀이 일반적으로 괴롭힘 당할 일 없는 백인 남성으로만 이뤄졌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지적한다. 여성, 흑인, 성소수자 등 다양한 사람들이 참여했다면 그러한 가능성을 세심하게 고려했을 것이다.

이러한 무지와 방관은 결국 부메랑으로 돌아와 사회적으로 문제를 일으켰고 비즈니스에도 악영향을 미쳤다. 저자는 여성 차별 사례도 꼼꼼하게 짚어가면서 프로그래밍에 있어 성별 차이는 전혀 없다고 단언한다. 누적된 ‘문화’ 탓에 여성들이 배제됐을 뿐이라는 것이다. 책에선 말한다. “무엇보다 프로그래밍 기술 자체가 중요해요. 나이나 성별 따위는 중요하지 않죠. 여러분이 누군지는 중요하지 않죠. 무슨 일을 할 수 있는지가 중요할 뿐입니다.” 정책적 노력을 통해 바꿔나가야 할 현실이다.

이세돌과 ‘알파고’의 대결로 당장의 현실이 된 인공지능(AI) 이야기에선 낙관과 우려가 교차한다. ‘딥러닝’으로 불리는 기계학습은 이전에 상상하지 못한 일들을 하나둘 가능케 하고 있다.

하지만 2015년 구글 사진 자동태그 기능에선 AI가 아프리카계 흑인 사진에 ‘고릴라들’이라는 극도로 모욕적인 인종차별 용어를 붙였다. 역시 백인들만의 인력 구성 때문이었고, 이는 중립적으로 보이는 AI도 ‘편향’될 수 있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드러냈다. 사법 분야에선 ‘콤파스’라는 AI 판사도 등장했는데, 이 법률 시스템에도 인종 편견이 들어갔다고 한다. 흑인 피고를 상습범으로 분류할 가능성이 백인보다 2배 높았다는 것이다. 판사가 콤파스 점수를 참고해 흑인 피고를 감옥에 더 보낼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이다. 흔히 불만족스럽거나 합당치 못한 판결을 두고 ‘AI 판사를 도입하는 게 차라리 낫겠다’는 비판 목소리도 있지만, 결코 미래를 낙관할 수 없다.

책에선 프로그래머들이 만들어낸 부작용의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들 대부분은 대학을 갓 졸업한 백인 엔지니어들로 세상이 얼마나 복잡한지, 정치가 무엇인지,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사는지 등에 관해서는 거의 아는 것이 없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모른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 그냥 똑똑한 것만으로, 기술을 추구하는 것만으로는 되지 않는다. 그들의 기술이 “현실을 정확히 반영하는 데 그칠 것이 아니라, 올바른 현실을 만들어내야” 한다. 우리가 그들에게 더욱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다.

배문규 기자 sobbell@kyunghyang.com

▶ 장도리 | 그림마당 보기

▶ 경향 유튜브 구독▶ 경향 페이스북 구독

©경향신문(www.kha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