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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0 (금)

[책과 삶]‘냉전의 씨앗’이 된 그들만의 ‘외교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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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타: 8일간의 외교전쟁

세르히 플로히 지음·허승철 옮김

역사비평사 | 756쪽 | 4만5000원

경향신문

영국 총리 윈스턴 처칠,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 소련 공산당 서기장 이오시프 스탈린(이상 앞줄 왼쪽부터)은 1945년 2월 크림반도의 휴양도시 얄타에 모여 8일간 ‘외교 전쟁’을 벌였다. 회담의 목적은 전쟁의 종식과 영구적인 평화였다. 그러나 얄타회담은 이들의 의도와 달리 ‘냉전의 씨앗’이 됐다. 역사비평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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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분단의 씨앗’. 한국인들이 학창시절 역사시간에 배운 ‘얄타회담’의 가장 큰 의미다. 그러나 ‘서운하게도’ 얄타회담에 이런 의미 부여를 하는 사람은 한국인뿐일 것이다. 얄타회담에서 한국이란 이름은 거의 나오지 않았다. 극동아시아 전체에 대해서도 그리 많은 시간을 할애하지 않았다. 대신 독일이 패전하면 미국과 영국, 소련, 프랑스 등 4개국이 분할 점령하고, 폴란드에서는 선거할 때까지 임시정부를 두기로 합의했다. 유럽 국경선, 전쟁 배상금, 전쟁포로, 소련의 대일전 참전 등도 논의했다.

소련에서 태어난 미국 하버드대 석좌교수 세르히 플로히가 쓴 <얄타: 8일간의 외교전쟁>은 1945년 2월4일부터 8일간 열린 얄타회담의 모든 것을 기록한 책이다. 4선에 성공해 취임식을 마친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1882~1945)가 얄타로 향하는 장면으로 시작해, 얄타회담과 관련된 것이라면 소소한 것까지 몽땅 책에 넣었다. 저자는 기밀문서와 공식 회의 자료, 회담에 참석했던 사람들의 일기와 회고록 등을 바탕으로 얄타회담을 ‘복원’했다. 플로히는 “루스벨트, 처칠, 스탈린 그리고 그 밖의 다른 사람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들이 실제로 얘기했을 법한 말을 추정해 쓴 것”이고 “모든 자료를 활용해 이것을 재구성하려고 노력했다”고 밝혔다.

루스벨트와 영국 총리 윈스턴 처칠(1874~1965), 소련 공산당 서기장 이오시프 스탈린(1878~1953)은 각각 모두 다른 목적을 갖고 크림반도의 휴양지 얄타에 모였다. 루스벨트는 세계평화기구 창설과 세계경제 경쟁에서 미국의 우위 달성이라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처칠은 쇠약해지는 대영제국의 위상을 높이고 유럽에서 영향권을 가지려 했다. 스탈린은 국제적 고립 끝에 강대국 지위를 인정받고 동유럽에서 영향권을 확대하고자 했다. 물론 공통의 목표도 있었다. 세계대전을 끝내고 평화를 가져와야 했다. 각자의 이익을 충족시키면서도 협상을 타결시켜야 한다는 어려운 숙제가 이들에게 주어졌다.

8일 동안 말 그대로 ‘외교전쟁’이 벌어졌다. ‘서구와 소련’이라는 전통적 구도로 보면 미국과 영국이 힘을 합쳐 소련을 압박해야 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루스벨트는 세계평화기구의 창설 및 유럽·태평양에서의 군사적 승리를 염두에 두면서 유럽 문제를 부차적 관심사항으로 두었기에 스탈린을 경쟁자라기보다 잠재적 우방으로 여겼다. 반면 처칠은 지중해 통제권을 영국이 장악하길 원하고 동유럽 국가 독립이 영국 안보에 중요하다고 여겼기에 스탈린을 경쟁자이면서도 잠재적인 적으로 보았다. 회담에서 협상 의제에 따라 미국과 영국은 같은 입장을 취하기도 했지만, 서로 갈등하면서 소련 측 입장을 지지하기도 했다.

경향신문

얄타회담의 ‘승자’는 스탈린이었다. 미국과 영국은 시작할 때부터 소련에 ‘아쉬운 소리’를 할 수밖에 없었다. 얄타회담 직전 서방 연합국이 처한 상황을 영국 외무장관 앤서니 이든은 이렇게 정리했다. “우리가 그들에게 제공할 것은 많지 않다. 그러나 … 우리는 그들에게 많은 것을 요구했다.” 서방이 스탈린에게 제공할 ‘많지 않은 것’에는 소련의 영토 획득을 인정하는 것과 독일 전리품의 가장 좋은 몫을 소련에 할당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회담 장소가 소련 영토인 얄타로 결정된 것도 그 때문이었다.

당시에는 ‘성공적’이라 자평했지만, 결국 얄타회담은 ‘냉전의 씨앗’이 되었다. 루스벨트와 그의 참모들은 “동유럽과 중국을 스탈린에게 팔아넘겼을 뿐만 아니라 국내에서 공산주의를 조장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누가 동유럽을 팔아넘겼는가” “대일전에 참전하도록 소련을 설득한 일은 미국의 이익에 부합하는 것이었는가”라는 논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한반도 분단은 얄타회담이 만들어낸 아주 작은 결과에 불과했다. 저자 플로히는 한국어판 특별서문에 이렇게 썼다. “루스벨트와 스탈린은 얄타회담 중 가장 중요한 회합에서 한국에 대한 신탁통치를 논의했다. (…) 루스벨트는 영국이 한반도 문제에 관여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고, 스탈린은 미국이 한반도에 들어오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두 지도자가 얄타에서 한국 문제에 대한 합의를 도출해내지 못했기 때문에 결국 그해 여름 한반도의 분할이 초래되었다. 이 회합에서 소련의 태평양전쟁 참전이 결정되었고, 이때의 논의가 한국의 미래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시대였다. 그것이 세계의 질서였다. 플로히는 책 프롤로그에서 얄타회담의 성격을 몇 줄로 명쾌하게 요약했다. “세 사람은 머리를 맞대고 20세기의 가장 비밀스러운 평화회담을 진행했다. 그들은 수백만의 병력을 이동시켰으며 자신들에게 필요한 대로 전승국의 정의를 분배했다. 이 과정에서 평화의 지속을 위해 필요하다는 이유를 내세워 다른 국가들의 운명을 결정하고, 수백만명의 난민을 동쪽과 서쪽으로 보냈다. 그들은 이 평화와 승리자의 이익을 지킬 기구를 만들었다. 이 지도자들은 회담을 마친 뒤 만족과 불안의 마음을 동시에 안고 얄타를 떠났다. 그들 뒤에는 수천만명의 인명을 앗아간 두 차례의 세계대전으로 황폐화된 30년이 있었고, 앞에는 전후 세계의 불확실성이 놓여 있었다.”

홍진수 기자 soo43@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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