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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8 (일)

[사유와 성찰]디지털 성폭력 대응, 코로나19 대응처럼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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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성폭력은 변종 바이러스

국가가 성범죄 방역도 책임져야

감염경로 살피듯 유통경로 추적


시스템이 변해야 심리방역 가능

피해자를 살리는 시스템 만들자


인류가 코로나19 감염 공포로 떨고 있는 가운데 많은 국가들이 대한민국의 방역시스템을 극찬하며 배우려 하고 있다. 무엇보다 보건당국과 의료진의 헌신은 칭찬받아 마땅하다.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는데 우린 어떻게 이리도 효율적인 대응을 할 수 있었을까?

경향신문

오래전부터 우리 민족은 나무보다 숲을 보는 시스템 사고에 익숙하다. 그래서 일찍이 동양은 곪은 데를 도려내는 서구의 외과수술보다 혈을 전체적으로 순환시키는 침술의학을 발전시켜왔다. 시스템 사고는 문제를 하나의 원인으로 보지 않고, 거미줄처럼 얽힌 망으로 이해하고자 한다. 우리 방역시스템에도 이런 시스템 사고가 녹아져 있다. 무조건 입국을 봉쇄하는 것은 일단 문제가 될 만한 부위를 걷어내는 수술과 흡사하다. 하나 감염자 개인보다 동선파악과 전파경로를 긴하게 챙긴 것은 신체의 혈액순환을 전체적으로 살피는 일과 닮아있다.

인류의 역사와 함께해온 바이러스의 존재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듯, 성폭력의 역사도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또한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예전 바이러스에 비해 쉽고 빠르게 전염되는 특징을 보이듯, 디지털 성폭력 역시 전염속도가 ‘역대급’이다. 이미 20년 전, 불법 음란물 유통사이트의 시초격인 소라넷의 회원은 100만명을 넘었었다. 수사가 시작되자 사이트 운영자가 해외로 서버를 옮겼다. 2016년 소라넷이 폐쇄된 후에도 제2, 제3의 소라넷으로 불리는 사이트들이 계속해서 생겨났다. 온 세계가 부러워하는 바이러스 방역시스템과는 달리 디지털 성범죄에 대한 대응은 20년 넘게 제자리걸음이다.

이런 부실한 대응 탓에 성폭력 범죄는 온라인시스템을 백분 활용하여 산업화되어 왔다. 2018년에는 불법영상물과 관련하여 일부 웹하드 업체와 필터링 업체, 디지털 장의업체 간 유착관계로 이득을 취하는 이른바 ‘웹하드 카르텔’의 실체가 드러났다. 디지털 성범죄의 산업구조, 즉 불법영상 삭제를 요청하는 피해여성으로부터 돈을 받고 영상을 지워주는 디지털 장의업체와 그 삭제영상을 다시 올리는 웹하드 업체가 결탁되어 있다는 사실은 많은 이들을 충격에 빠뜨렸다. 최근 발생한 ‘n번방 사건’ 역시 소라넷의 변종 바이러스다. 오직 가해자 개인만 조명하는 n번방 언론보도 이후에도 유사 n번방이 생겨나거나 n번방 불법영상을 판매한다는 글들이 공유되면서 수많은 피해여성들은 여전히 말로 다할 수 없는 고통 가운데 있다.

정부가 왜 유독 디지털 성범죄는 시스템적으로 대응하지 못하는가? 우리의 문화적 자산인 시스템적 대응은 한 개인을 문제의 유일한 원인으로 보고 봉쇄하는 일보다 체계적인 동선과 전파경로 파악을 우선시하지 않았던가? 가해자 한 명의 일대기를 써가며 시스템 접근을 방해하는 요상한 언론 때문인가? 국가는 디지털 성폭력을 단순히 개인 간 발생한 문제로 접근하지 마라. 나라 전체 시스템의 문제다. 이는 구조적이고 문화적인 성폭력이고, 불법촬영물이 상품으로 유통되는 시장이 존재하는 한 시스템 전체를 바꾸어야 할 문제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피해자들이 숨지 않고 외부에 도움을 청하는 시스템으로 만드는 일이 급선무다. 난 최근 디지털 성폭력을 입은 여성들을 심리·지원하는 서울시 사업에 연구책임자로 참여했다. 디지털 성폭력 피해자들은 매일매일 죽을 결심을 하다가도, 자살한 이의 동영상은 ‘유작’이라는 이름으로 더 비싼 값에 유통된다는 사실에 죽지도 못한다는 말을 듣고 시스템의 괴력에 치가 떨렸다. 여전히 생존피해여성들은 ‘왜 그런 사람을 만났느냐’ 혹은 ‘정말 찍히는 줄 몰랐냐?’며 자신에게 일말의 책임을 묻는 문화로 인해 세상 밖으로 나올 수조차 없다. 함정에 빠진 책임은 여성이 아니라, 그런 콘텐츠가 유통되게 만드는 우리 사회의 시스템에 있지 않은가. 세계적인 방역시스템을 자랑하는 정부여, 이제 디지털 성폭력도 철저하게 방역하라!

권수영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상담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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