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4.28 (일)

[삶과문화] 진정한 편안함은 줄 선 사람에게 온다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줄서기의 피곤함은 ‘무임승차’서 야기돼 / 끼어든 자, 반성하면 일상 편안하게 될 것

올해 초에 제주도에 갔다가 울창한 숲속이 아닌 어느 조그만 돈가스 식당 앞에서 야영하는 젊은이들을 본 적 있다. 애초엔 식사 한두 시간 전에 줄을 서기 시작했을 텐데 실패로 돌아가고, 점점 대기시간이 길어지더니 급기야 텐트족까지 등장한 것이다. 맛난 것을 입에 넣는 30분 동안의 행복을 위해 10시간 넘게 기다리다니, 그 시간을 돈으로 환산하면 도대체 얼마짜리 돈가스란 말인가! 그런데 가만히 살펴보니 젊은이들은 줄서는 과정을 매순간 즐기기로 작정한 듯했다. 훗날 두고두고 기억할 만한 인생의 이야깃거리 하나를 만드는 중이라고나 할까.

살면서 가끔 줄을 설 일이 있다. 새로운 게임 프로그램이 출시되면 그걸 사기 위해 숨어 있던 게임 마니아들이 동트기 전부터 말없이 하나둘 집 밖을 나와 줄을 선다고 들었다. 자녀를 사립유치원에 입학시키기 위해 겨울의 찬 공기를 마다치 않고 줄을 서기도 하고, 요즘엔 코로나19로 인해 경제적 타격이 큰 소상공인들이 대출을 받기 위해 은행 앞에서 밤새 줄을 선다는 소식도 들린다. 대부분의 줄서기는 즐거운 이벤트가 아니라 오로지 목표 하나만을 생각한 채로 버텨내야 하는 자기와의 싸움이다.

세계일보

이주은 건국대 교수·미술사


인터넷 예매가 불가능했던 시절에는 영화관과 버스터미널에서도 줄을 섰고, 번호표 발급기가 없었던 때에는 은행에 가서도 줄을 섰다. 휴대폰이 등장하기 전에는 공중전화 부스 앞에 발을 동동 구르며 줄을 서야 했다. 중년이 된 이후로는 줄 설 일이 다소 줄었다. 마냥 줄서는 것의 피곤함을 알기에 되도록 예약을 받는 장소를 선호한 덕분이다. 줄서기의 피곤함은 사실 기다리는 시간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약삭빠른 누군가가 은근슬쩍 무임승차하는 것에서 야기된다.

가령 줄을 서고 있는데 어떤 남자가 슬며시 다가오더니 내 앞의 여자와 대화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끼어든다. 그녀의 남편인 모양이다. 그런가 하면 한 사람이 서 있는데 그 자리에 친구 두 명이 합류하기도 한다. 먼저 도착한 사람이 일행을 위해 자리를 맡아두는 경우인데, 과연 어느 수준까지 끼어듦이 용인될 수 있는지 모르겠다. ‘개인보다는 가구로 세대를 따지는 사회에 살고 있으니 가족은 끼어들어도 인정해 주자. 한 사람이 두 명 정도는 친구의 자리를 맡아두어도 괜찮겠지. 세 명부터는 뒤로 가라고 하자.’ 이런 잡다한 생각들이 머리에 떠오르기 때문에 줄서기가 피곤한 것이다.

심지어 이런저런 이유로 끼워 주었더니 하필 내 앞에서 오늘의 수용인원이 딱 끊어져 버린다고 생각해 보라. 지금까지 성실하다는 자부심 하나로 꿋꿋이 살아오던 내가 갑작스레 경쟁사회의 무능력자로 전락해 버리고 만다. 자꾸만 뒤로 밀리는 상황에도 예민해져 있는데, 불필요한 자괴감에까지 빠져야 한다니! 이런 스트레스가 하루에 여러 개 쌓이면 삶이 결코 편안하지가 않다.

‘흔들리지 않는 편안함’을 내세우는 어느 침대 광고의 슈퍼마켓 편을 보면, 사람들이 계산대에 줄을 서 있고, 어느 남자가 새치기로 들어와 먼저 계산하려 든다. 이때 침대이름이 커다랗게 등장하며 남자를 저 끝으로 밀어낸다. 이 광고는 ‘흔들리지 않는 편안함’에 대해 접근한 방식이 참신하여 최근에 주목을 받고 있다. 광고만 봐도 이상하게 속이 후련하다는 사람도 있다.

줄을 선 사람이 무력함을 느끼지 않고, 끼어든 사람이 부끄러워질 때 비로소 일상의 편안함이 흔들리지 않는다. 규칙을 어긴 사람은 ‘왜 그렇게 사세요?’라는 주변 사람들의 암묵적인 시선을 온몸에 칼침처럼 받는다. 그 따가운 눈빛에 명예를 잃고 수치심을 느낀다면 그는 징벌을 받은 것이다. 만일 아무렇지도 않다면 그는 원래부터 지킬 명예가 없는 천인이다.

줄을 선다는 것, 그 줄이 흔들림 없이 유지된다는 것은 도착한 순서대로 앞뒤가 정해지고 또 그렇게 기다리면 언젠가는 내 차례가 온다는 상호간의 믿음에 근거하는 행위다. 자기를 특별하게 생각하며 권력을 행사하고 싶은 사람에게는 참 답답한 방식일 수도 있다. ‘줄서기’라는 말을 사전에서 검색하면, 권력이 있는 사람이나 기관에 붙어 친분을 맺는다는 뜻도 뜬다. 며칠 후면 투표일이다. 권력에 줄서는 사람이 아니라 일상에서 줄을 선 사람이 조마조마하지 않고 편안한 마음으로 살 수 있는 세상이 오면 좋겠다.

이주은 건국대 교수·미술사

ⓒ 세상을 보는 눈, 세계일보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