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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7 (토)

[기자가만난세상] 性 착취 피해자들 용기에 답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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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달여 전 텔레그램 성착취물 공유방에 신상 정보가 유출된 피해자를 마주했던 기억이 요 며칠 더욱 생생하다.

피해자의 집 식탁을 사이에 두고 마주한 A양은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A양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렸던 사진과 전화번호, 집 주소 등이 자신도 모르는 새 유포돼 경찰서에 신고하러 갔다 증거 부족 등을 이유로 신고를 반려당했다. 휴대전화에는 낯선 남성들로부터 걸려온 전화 기록과 카카오톡 대화들이 가득했다. 그는 집 초인종만 울려도 방 안에 숨어 벌벌 떨게 된다고 했다.

세계일보

박지원 사회부 기자


다행히 성착취로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신상정보 유출 그 자체만으로도 피해자에겐 충분히 공포스러웠을 상황. A양은 용기를 내 찾아간 경찰서에서 진정서를 접수하지 못하고 돌아 나오던 그때, 수사기관에서 도움을 받을 수 없다면 누가 날 도와줄 수 있을까 하는 절망감을 맛보았다고 말했다.

다른 텔레그램 성착취물 공유방 피해자들의 상황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수사기관의 보호와 도움이 절실할 것이고, 가해자의 엄벌을 간절히 바랄 것이다. 완전 삭제가 어렵고 재범률이 높은 디지털 성범죄의 특성상 피해의 흔적은 어쩌면 이들을 평생 따라다니며 괴롭힐지 모른다.

다행인 것은 이들이 숨기보다 적극적으로 범죄자들의 엄벌을 촉구하고 나서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지난 8일 ‘와치맨’ 전모(38)씨로부터 피해를 입은 한 피해자는 수원지검에 직접 고소장을 냈다. 피해자는 “전씨에게 3년6개월이라는 적은 구형이 이뤄진 데에 분노했다”며 “더 이상 숨지 않고 적극적으로 고소할 것”이라고 목소리를 냈다.

텔레그램 성착취 공동대책위원회는 피해자 중 일부가 직접 고소·고발을 하길 원한다며 법률적 도움 등 이들을 지원할 계획임을 밝혔다. 공대위 관계자는 “지금도 수사나 사법절차에서 피해당사자의 목소리가 소홀히 다뤄지는 일이 빈번하다”며 이로 인해 직접 엄벌을 촉구하는 목소리를 내고자 생각한 피해자들도 있다고 설명했다.

피해자들이 용기 내 범죄 피해의 그늘 밖으로 나와 법정에 서기를 감수한 만큼 사회는 변화로 응답해야 한다. 대중도 디지털 성범죄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공분을 표출하고 있다. 청와대에서 답변을 내놓은 텔레그램 성착취 관련 국민청원 5건의 동의 인원은 10일 기준 합산 618만명을 넘겼다. 대중의 지지와 피해자들의 용기에 힘입어 이제는 수사기관과 사법부·입법부가 움직여야 한다.

디지털 성범죄에 대한 양형기준을 마련하고, 유엔아동권리위원회의 권고대로 미성년자를 대상으로 한 ‘온라인 그루밍’ 처벌법을 마련해 성착취 발생을 미연에 방지해야 한다. 용기를 내 고소·고발에 나선 피해자들의 신상정보가 가해자에게 알려져 복수 등에 악용되지 않도록 피해자를 보호할 장치를 마련할 필요도 있다.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들은 하루아침에 생겨난 것이 아니다. 23년 전 ‘빨간 마후라 사건’에서부터 여성 연예인을 대상으로 한 불법 촬영물, 웹하드, 소라넷 등에 이르기까지 사회가 디지털 성범죄를 외면하고 방관해온 긴 시간 동안 피해자들은 늘어났다. 방관과 묵인이 빚은 끔찍한 결과를 우리는 지금 목격하고 있다. 같은 일이 반복되도록 손 놓고 있을 순 없다.

박지원 사회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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