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5.03 (금)

[기자의 시각] '해고 금지법' 유토피아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조선일보

곽래건 사회정책부 기자


몇 년 전 홍콩의 한 기업에 입사한 친구가 전화통을 붙잡고 하소연을 늘어놓은 적이 있다. "함께 입사한 또래 동료가 오후에 갑자기 해고 통보를 받고 짐 싸서 나갔다"고 했다. 홍콩에 가기 전 국내에서도 취업한 적이 있었던 친구는 "오전까지도 웃고 떠들던 동료가 갑자기 해고되는 모습에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홍콩에선 채용 1개월 이내라면 사전 통지 없이 해고가 가능하다. 미국은 더하다. 채용 기간과 상관없이 해고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선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현행 근로기준법은 해고 사유와 절차를 까다롭게 규정하고 있다. 이 때문에 기업들은 실제로는 해고 대신 주로 권고사직이나 희망퇴직 형식으로 직원을 내보낸다. 그래도 부당해고 시비가 끊이질 않는다. 외환 위기 이후 1998년 도입된 정리해고도 사유와 절차가 까다롭다.

우리 노동 시장의 특징은 '경직성'이다. 한 번 직장에 들어가면 쉽게 잘리지 않고, 이직도 거의 하지 않는다. 지난해 10월 열린 세계경제포럼(WEF)은 '노동시장의 유연성' 항목에서 한국을 조사 대상 141국 중 97위로 평가했다. WEF는 당시 한국에 대해 "노동시장의 경직성을 개선해야 한다"고 충고했다.

이런 상황인데 노동계는 이번 총선을 앞두고 해고제한법과 해고금지법을 들고 나왔다. 민주노총은 지난 6일 정의당·민중당과 "코로나 사태가 지속되는 동안 경영상 사유에 의한 해고를 금지하고, 해고금지 특별법으로 모든 노동자의 고용 안정을 보장하라"고 했다. 한국노총도 지난달 30일 "일시적인 경영 악화로는 해고할 수 없게 해고제한법을 도입하자"고 정부에 요구했다.

해고를 반길 근로자는 없다. 한 번 해고되면 다시 제대로 된 직장에 취업하기 어려운 우리나라에선 더더욱 그렇다. 하지만 아예 해고를 못 하게 법으로 막자는 것은 또 다른 차원의 이야기다. 극단적으로는 기업이 해고금지법으로 구조조정을 못 하다 파산하면 그 회사의 모든 근로자가 일자리를 잃을 수도 있다.

또 기존 취업자들은 철밥통을 받아들게 되지만, 신규 취업은 줄어들게 한다. 기업 입장에선 사람을 내보내기 어려우니 채용에 부담을 느끼고, 경기 호황기에도 채용이 크게 늘지 않는다. 그 결과 청년 고용은 줄고, 한 번 직장에서 나오면 재취업은 거의 불가능해진다. 일자리를 강하게 보호할수록 일자리를 갖지 못한 사람들은 더 어려운 처지로 몰린다. 청년 실업은 늘어갈 수밖에 없다.

코로나 사태로 중소상공인, 자영업자는 물론이고 대기업들도 어려움을 겪고 있다. 구조조정, 인력 감축 등의 찬바람이 돈다. 실업 확대에 따른 충격을 흡수할 방법을 찾기 위해 정부와 노사가 머리를 맞대야 한다. 대한민국을 '해고가 없는 나라'로 만든다고 문제가 해결될 리 없다.

[곽래건 사회정책부 기자]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