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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3 (목)

[커버스토리]문길주 센터장 “소득 3만달러 시대, 이제야 ‘작업복 세탁권’ 논하는 건 창피한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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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복 세탁소’ 처음 제안한 문길주 전남노동권익 센터장

경향신문

2012년 ‘작업복 세탁소’ 아이디어를 처음 제안한 문길주 전남노동권익센터장은 요즘 농업 노동자들을 위한 ‘농민 세탁소’를 추진하고 있다. 문 센터장은 “노동자들의 세탁할 권리를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공동체의 문제로 생각하고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창길 기자 cut@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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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50인 미만 사업장 노동자 1000만명

기름때·먼지·화학물질 뒤범벅된 작업복

가족들 옷과 함께 세탁…교차오염 우려

일 특성상 오염되는데 왜 노동자 책임인가

정부가 나서 시스템 개선…공공사업 돼야


‘작업복 세탁소’를 처음 제안한 이는 문길주 전남노동권익센터장(48)이다. 8년 전 민주노총 금속노조에서 일할 당시 운을 뗐고. 2018년 지방선거 때 본격적으로 추진에 나선 것이 지금에서야 조금씩 결실을 맺고 있다. 문 센터장은 “소득 3만달러 시대에 이제야 작업복 세탁할 권리를 얘기할 수 있다는 건 창피한 일”이라며 “회사와 지자체가 적극적으로 이 문제에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문 센터장은 농약과 흙먼지 세탁이 어려운 농업 노동자들을 위한 ‘농민 세탁소’도 추진하고 있다.

- 작업복 세탁소는 어떻게 생각하게 됐나요.

“2012년에 생산현장에서 암환자들이 많이 발생하자 발암물질 찾기, 노동현장 개선 움직임이 일어났어요. 그때 조사를 통해 대기업 공장에선 작업복을 회사가 세탁해주는데, 50인 미만 사업장 노동자들은 작업복을 집에 가져가서 개별 세탁한다는 걸 알게 됐어요. 모든 산업단지에 세탁소를 설치하자는 안을 냈는데, 그때 노동계는 박근혜 정권의 ‘타임오프’(근로시간면제) 도입으로 노조 존립 자체가 위태위태한 상황이었거든요. 그래서 더 얘길 못하다가 제가 영세사업장 노동자들의 건강 문제를 상담하는 근로자건강센터(광주)에서 일하게 됐어요. 금요일만 되면 노동자분들이 쇼핑백을 한두 개씩 들고 오시더라고요. 물어보니 작업복이래요. 냄새도 나고 위험한 것 같은데, 집에 세탁기가 한 대밖에 없으니까 어쩔 수 없이 아내, 아이들 옷과 같이 빤대요. 기름때, 먼지, 화학물질 때문에 교차오염에 대한 걱정도 많더라고요. 이거 안되겠다 싶었죠.”

- 어떤 방식의 세탁소를 구상했습니까.

“작업복 세탁은 1차적으로는 사업주가 책임지는 게 맞아요. 그런데 50인 미만의 영세한 사업장에서 세탁소까지 만들기엔 부담이 되는 거예요. 최소한 국가산업단지에는 지자체와 정부가 돈을 투입해서 공공개념의 ‘작업복 세탁소’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2017년부터 세탁소 기획안을 만들어서 돌리기 시작했는데, 노동활동가분들도 ‘그게 현실적으로 되겠느냐’고 해서 다 퇴짜를 맞았어요. 저는 그래도 이건 무조건 추진해야 한다고 봤습니다.”

- 작업복 세탁소는 2018년 광주에서 처음 논의되기 시작했죠.

“6·13 지방선거를 앞두고 광주시장 후보들에게 작업복 세탁소에 대한 질의서를 보냈어요. 다 무시할 줄 알았는데 모두 찬성한다고 답변해서 놀랐죠. 노동절을 앞두고 4월30일에 이용섭 당시 후보가 근로자건강센터를 방문했어요. 간담회 끝나고 질문 있으면 하라고 해서 제가 기다렸다는 듯이 했죠. ‘50인 미만 사업장 노동자를 위해서 산업단지에 세탁소 하나만 만들어주시면 안되겠습니까?’ 그때 후보 측에서 바로 보도자료를 냈어요. 산업단지에 세탁소가 설치되도록 노력하겠다고요. 그런데 당선 이후로는 무소식이었어요.”

- ‘노·사·민·정’ 형태의 작업복 세탁소는 광주가 아니라 2019년 11월 경남 김해에서 처음으로 문을 열었습니다.

“노동운동계 선배이기도 한 윤난실 전 광주시의원이 경남도청 사회혁신추진단장으로 가면서 제 기획안을 가져갔어요. 김경수 도지사가 바로 추진하라고 하면서 만들어진 거죠. 그게 2018년 하반기였는데, 관에서 의지를 갖고 하니까 빨리 된 거죠. (오랫동안 노력했는데, 다른 지역에 먼저 생겨서 좀 허탈했을 것 같습니다.) 많이 속상했죠. 하지만 전체 노동자를 위한 건데 김해가 먼저면 어떻고 광주가 먼저면 어떻습니까.”

- 김해를 시작으로 여러 지자체에서 작업복 세탁소 설립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보완됐으면 하는 점이 있나요.

“작업복 세탁소는 노·사·민·정의 네 요소가 톱니바퀴처럼 잘 굴러가야 합니다. 김해를 시작으로 일단 첫발을 뗐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금 김해는 벌당 500원을 받고 있고, 광주는 600원으로 비용을 책정하고 있어요. 물론 저렴한 가격이지만, 장기적으로 봤을 때 이 비용도 없애야 한다고 생각해요. 누적되면 영세 노동자들에겐 이 비용도 부담이 될 겁니다. 작업복은 일의 특성상 필요하며 오염되는데 왜 노동자가 다 책임져야 할까요. 작업복 세탁소는 공공사업으로 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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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복을 수거하고 배송하는 김해 노동자작업복세탁소의 차량. 김창길 기자 cut@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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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농민 세탁소도 추진하고 있죠.

“제가 전남 보성 출신인데요. 지금도 기억나는 장면들이 있어요. 어머니가 저한테 ‘길주야, 아버지가 고추밭에 농약 치고 있으니 막걸리 한 사발 받고 김치 한 그릇 해서 얼른 갖다 드려라’ 하세요. 제가 가져가면 아버님은 밭에 턱 앉아서, 농약 묻은 손으로 김치와 막걸리를 드셨어요. 집에 오시면 옷은 그대로 두고 샤워만 간단히 하고, 다음날 약 묻은 옷을 또 입고 가셨죠. 작업복이라는 게 따로 있다기보다는 우비나 허름한 옷을 주로 입어요. 농민들이 농약중독에 걸리는 일이 많잖아요. 지금도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아요. 요즘 농촌은 일흔 살이면 젊은 사람입니다. 연로한 어머님들이 농약 묻은 옷을 빨아요. 얼마나 힘듭니까. 잘 지워지지도 않고요. 그런데 농촌은 산업단지처럼 밀집해 있지 않잖아요. 그러니까 탑차에 이동용 세탁기를 넣어서 날을 정해 마을회관을 도는 겁니다. 이장이 ‘오늘은 세탁해주는 날입니다’라고 방송을 하는 거죠. 농민들은 아침에 작업복을 갖고 왔다가 저녁에 찾아가면 되는 겁니다.”

- 어느 정도 진행됐습니까.

“나주, 해남, 보성 지자체장에 질의서를 보냈어요. 전남이 농업을 기반으로 발전했는데 이 정도는 기본이라고 생각해요. 근데 공무원들 반응은 참 제 마음과는 달라요. 이번에도 오래 걸릴 각오는 하고 있습니다.” (인터뷰 후 나주시와 해남시는 “어려울 것 같다” “시간이 걸릴 거 같다”는 답변서를 보내왔다.)

- 깨끗하고 안전한 옷을 입고 일하는 것은 노동자의 기본권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이렇게 오랫동안 노력하고 설득해야 하는 사실이 불합리해 보입니다.

“소득 3만달러 시대라고 하는데 세탁할 권리를 거론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정말 창피한 일이죠. 작업복 세탁과 안전의 문제를 지역사회와 공동체의 문제로 보지 않고, 노동자 개인의 문제로 보고 있는 거예요. 그동안 노동운동을 통해 노동자의 인권이 그나마 개선됐지만, 여전히 50인 미만 사업장 노동자의 열악한 노동환경은 나아지지 않고 있어요. 여전히 이분들은 씻을 권리, 세탁할 권리를 위해 싸워야 하는 상황입니다. 노조 조직률도 미미하고, 사업장 자체도 영세하기 때문에 문제가 있어도 스스로 나서기 어려워요. 50인 미만 사업장에서 일하는 분들의 수가 약 1000만명입니다. 정부가 먼저 시스템 개선을 위해 나서줘야 합니다.”

장은교 기자 indi@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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