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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30 (목)

세습 국회의원 한국5배...日에는 왜 정치금수저가 많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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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일 톺아보기-11] ※톺아보기란 '샅샅이 더듬어 뒤지면서 찾아본다'는 순우리말입니다. 한중일 톺아보기는 동북아에서 일어나는 굵직한 이슈부터 소소한 소식까지 살펴보는 코너입니다.

21대 총선이 코앞입니다. 코로나19 사태로 시민들이 외출을 꺼리면서 투표율 저하가 예상된다는 분석도 있지만, 선거에 대한 열기만큼은 더 뜨거워진 느낌입니다. 총선 전후 한국의 상황은 국내 언론들뿐 아니라 해외 언론들도 비중 있게 보도하고 있는데요.

특히 일본의 언론들은 한국 총선에 많은 관심을 나타내는 모습입니다. 도쿄신문은 코로나19 방역을 두고 여야가 대립하는 가운데 '한중전' '한일전'이라는 과격한 표현까지 등장했다고 보도했고, 교도통신은 여권 유력 정치인의 자제가 부친 지역구에 출마하려다 세습정치 논란으로 공천을 포기했다는 기사를 내보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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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장인, 장모, 조부모 중 어느 한쪽 또는 3촌 이내 친척 가운데 국회의원이 있고 그가 당선됐던 동일한 선거구에 입후보한 후보를 `세습`이라고 정의할 때, 2017년 일본 중의원 기준 세습의원 비율은 26%에 달함/그래픽=조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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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세습 정치인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하지만 한일 양국의 정치를 비교해 본다면 양국 정치의 차이점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이 바로 세습의원의 비율과 이에 대한 세간의 인식입니다. 일본은 G7(선진국 주요7개국)은 물론 OECD 국가 중에서도 유독 높은 세습정치인 비율을 보이고 있습니다. 일본 경제지 '닛케이'와 '다이아몬드'에 따르면 일본의 세습의원 비율은 중의원의 경우 26%, 집권 자민당은 무려 40% 에 달하고 현재 내각을 구성하는 각료의 절반가량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2012년 월스트리트저널(WSJ)의 여론조사에서는 정치세습에 대해"제한해야 한다"는 일본인들의 응답은 51%,"제한할 필요없다"는 응답은 49%로 비등한 것으로 나타나기도 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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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물 정치가가 후계자로 지목한 장남과 급사하자 회사원이던 차남이 가업인 정치를 하기위해 부친 지역구에 출마하는 스토리의 일본 만화 `정치9단`(좌)/ `정치9단`을 모토로 제작된 것으로 알려진 드라마 `체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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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드라마나 만화에서조차 정치 세습이 아무 위화감 없는 소재로 자주 쓰이곤 합니다. 세습 정치인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없는 건 아니지만 실질적 변화로 이어지는 경우는 없고, 세습정치가 나름 장점이 있다는 논리를 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엄연히 민주주의를 채택하고 있고 아시아 최고 선진국이라 자부하는 일본인데, 왜 권력을 대물림하는 세습정치가 만연한 걸까요.

◆'3방' 갖춘 세습후보가 절대 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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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 총리는 부친으로부터 60여개 이상의 단체를 통해 정치자금을 상속 받았다. 현 아베내각 각료의 과반수는 세습정치인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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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는 소위 '3방'을 이어받은 자가 선거에서 절대적으로 유리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정치 세습의 요인으로 흔히 언급되는 3방은 지방(地盤)·간방(看板)·가방(鞄)을 의미합니다. 먼저 '지방'이란 후보자의 후원회 같은 조직적 기반을 말하는데, 선거구 내에 형성된 인적 네트워크로 집표 활동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습 후보에게 계승된 후원회가 그를 지원하고, 후원회 입장에서도 세습 정치인이 당선되면 사업자 선정이나 민원처리 등에 대한 편의를 봐주니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는 겁니다. 후원회를 통해 당선된 의원은 다시 해당 지역 인사들과 더 깊은 관계를 맺고 동고동락하다 은퇴 시 투자했던 후원회 유산을 친인척에게 물려주게 됩니다. 이런 구조에서 비세습 후보가 세습 후보와 후원회가 만든 장벽을 뚫기란 매우 어렵습니다.

'간방'은 간판, 즉 지명도를 의미하는데 세습 후보는 부친 등 친족이나 가문의 이름을 브랜드로 쉽게 인지도를 높일 수 있습니다. 비세습 후보와 달리 인지도를 높이려 돈과 시간을 쓸 필요가 없으니 처음부터 유리한 위치에 서는 겁니다.

마지막으로 '가방'은 넉넉한 정치자금을 의미합니다. 막대한 선거비용을 감당하기 어려운 비세습 후보와 달리, 세습 후보는 정치자금을 상속받음은 물론, 지명도 덕분에 더 많은 자금 모집이 용이해 쉽게 선거를 치르게 됩니다. 여기엔 후원회 등 정치자금을 관리하는 단체를 상속할 경우 상속·증여세 등 세금부과가 일절 없는 일본의 정치자금법도 일조하고 있습니다. 이 '3방'의 조건은 세습의원이 아니면 갖추기 어려운 정치 자산이다보니, 권력의 대물림을 부추기고 있습니다.

◆후보자 이름 직접쓰는 70년 전통 투표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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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보자의 성명을 자필로 써야 하는 일본 특유의 투표 방식. 보통 연필로 써야 한다/사진=유튜브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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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대부분의 선거에서 투표용지에 직접 후보자의 이름을 써내는 '자필 기술식' 투표 방식을 채택하고 있습니다. 1950년 이래 70년 넘게 고수해온 방식으로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보기 힘들죠. 부정 선거를 막고 투표용지를 준비하기 쉬운 장점이 있다고 하지만, 성씨가 수십만 개에 달하고 한자표기도 복잡한 일본에서 오기로 인한 무효표 양산의 주범이라는 지적이 많습니다. 획 하나라도 틀리면 무효가 되고 개표과정에서 유효표를 판단할 때 주관이 개입될 소지도 큽니다.

무엇보다 가장 큰 단점은 세습 정치인의 당선을 유리하게 한다는 겁니다. 일본 정치인들은 자신의 이름을 쓰기 쉬운 한자나 일본문자 '가나'로 표기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유권자들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인지도 있는 후보의 이름이 익숙해 기억하기 쉽고 쓰기에도 편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이 방식은 세습 후보에게 유리하게 작용하고 있습니다. 세습 의원들이 자식의 이름을 '이치로' '타로' 등 기억하기 쉬운 이름으로 짓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자필 기술식 투표 방식은 선진국에서 드물고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문제라는 의견이 많아 도장을 찍는 '기호식' 투표를 허용하려는 시도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자민당이 "유권자로 하여금 자신의 이름을 쓰게 하는 게 정치인의 일"이라는 논리로 반대하는 바람에 허용되지 못했죠. 2019년 참의원 선거기간에도 투표 방식에 대한 비판이 잠깐 일었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이 흐지부지 되고 말았습니다.

◆'분수 따라야'…세습에 관대한 국민성과 풍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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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하기우다 고이치 문부과학상은 입시제도와 관련해 "분수(身の丈·미노타케)에 맞게 노력해라"라는 발언으로 구설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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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장수 재임 중인 아베 신조 총리, 아소 타로 부총리,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의 아들이자 차기 총리감으로 거론되는 고이즈미 신지로 환경장관 등은 대표적인 '정치 금수저'들입니다. 이외에도 많은 정치인들이 권력을 세습하지만, 국민들은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습니다. 이 같은 분위기의 배경에는 직업의 귀천에 구애되지 않고 각자 놓인 위치를 받아들이는 국민들의 습성이 있습니다. 일본에서 자주 쓰이는 단어 중에 '미노타케(身の丈)' '미노호도(身の程)'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간단히 말해 '자신의 분수'라는 뜻입니다. 정치인들이야 원래 그런 계급과 가문에 속했던 사람들이니 정치는 그들이 하게 하고 자신들은 각자의 일에 집중하면 된다는 겁니다. 명문대를 나와 유망한 기업에서 승승장구하더라도 집안의 가업인 우동집이나 초밥집을 물려받기 위해 하루아침에 회사를 관두는 일이 흔한 것도 이 같은 사회적 풍토를 반영하는 것입니다.

일본인들의 감각으로는 권력 세습으로 공정성이 훼손되는 것보다 기존 관행과 분위기에 따르지 않는 것에 대한 불편함이 훨씬 큽니다. 그들이 입버릇처럼 말하는"공기를 읽는다"라는 표현은 분위기에 따라야 한다는 압박이 강한 일본 사회의 특성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여기에는 과거 사농공상의 계급사회가 뚜렷이 존재했지만 식민지배와 전쟁의 여파로 신분제가 한번 와해된 한국과 달리 봉건적 잔재가 여전히 강하게 남아 있는 영향도 있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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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세습정치 관행은 정치 무관심을 부추켜 투표율을 낮추는 요인으로 지목되고 있다/그래픽=조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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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고 가즈토 도쿄대 교수는 "원래 일본인들은 세습을 좋아했다"며 "일본은 역사적으로 과거제 같은 것도 없었고 섬나라 특성상 도망갈 데도 없으니 치열한 경쟁보다는 출생으로 모든 게 납득되는 세습이 받아들여지기 쉬운 환경이었다"고 설명하기도 합니다. 결국 정치 명문가의 후손들이 정치를 세습할 수 있는 것은 선거라는 민주적 과정에서 표를 던져주는 일본 유권자들이 있기 때문이니까요. 그러나 정치는 정치인들에게 맡긴다는 이 같은 인식은 한편으로 정치에 대한 무관심을 부추겨 투표율을 낮추는 요인으로 지목되고 있습니다.

◆"정치 세습도 장점있어" 옹호 목소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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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8년 “일본은 정치를 장인화, 전문가화 하고 있다”고 주장한 이완구 전 국무총리(좌)/부친 지역구에 출마하려다 세습정치 논란을 낳은 문석균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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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습 정치인이 국민을 위해 진정으로 봉사하고 능력도 출중하다면, 정치도 대대손손 가업 잇기를 명예롭게 여기는 일본인의 장인정신과 상통하는 일 아니냐고 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또한 직을 이어받을 사람이 정해져 있으니 관련 경험과 노하우를 미리 익히는 것이 가능하고, 필요한 인맥을 구축하기에도 좋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대를 이어 정치를 했으니 그 집안엔 남다른 정치 DNA가 있을 거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실제로 일본의 세습정치인들 중에는 출마 전에 부친의 비서로 활동하는 사람이 매우 많은데, 이때 부친의 밑에서 본격적인 정치수업을 받는 건 사실입니다.

그러나 자질과 능력이 부족한 사람이 정치를 하게 되면 국가와 사회 전체에 미치는 해악이 다른 직업군에 비해 매우 크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런 자잘한 장점보다는 단점이 훨씬 커 보입니다. 일본 내에서도 언론과 학자들을 중심으로 정치 세습이 자기들만의 폐쇄적 리그를 형성해 우수 인재의 진입을 어렵게 하고 정치의 활력과 역동성을 저해한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더 큰 편입니다.

◆한국 세습정치인 5%지만…국민체감은 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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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도 세습 정치의 폐해를 막기 위해 노력을 전혀 하지 않았던 건 아닙니다. 2009년 민주당은 자금관리단체와 지역구 승계금지 등 세습 후보의 출마를 제한하는 사항을 당규에 포함했습니다. 이에 자민당도 세습 후보자 금지공약을 발표하려 했지만, 국회의원 자격과 관련해 "가문을 이유로 차별해선 안 된다"는 일본의 헌법조항과 당내 반대를 이유로 미루고 미루다 사실상 철회한 상태입니다.

한국에서도 대를 이어 '금배지'를 다는 경우는 있지만, 20대 국회 기준 5%에 불과하니 일본에 비해 훨씬 양호한 상황으로 보입니다. 부의 대물림 논란이 뜨겁지만, 다행히 아직 정치 대물림은 만연하지 않다는 증거로도 보입니다.

그런데 지난해 시사저널의 여론조사 결과, 국민들이 한국 사회에서 가장 세습이 심화됐다고 꼽은 분야는 재계(41%)에 이어 정계(28%)가 두 번째인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는 산술적 수치와 국민들이 체감하는 정도에는 상당한 괴리가 있음을 암시해 줍니다. 18대 국회 10명, 19대 14명, 20대 15명 등 국회에 2세 정치인이 조금씩 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면서 한국도 2세 정치인 시대가 열렸다는 기사도 자주 눈에 띄고 있습니다.

세습 정치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처음부터 그들의 능력과 자질에 색안경을 끼고 볼 이유는 없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권력의 세습이 만연화돼 정치의 활력과 역동성을 기대할 수 없게 된 일본의 현실은 결코 바람직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현재 일본의 상황은 신경쓸 필요없는 남의 나라 일이 아닌, 앞으로 한국이 경계해야 할 좋은 반면교사가 되어주고 있습니다.

[신윤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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