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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6 (일)

‘넌 이제 안내견이 아니라 내 반려견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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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멀피플] 서민의 춘추멍멍시대_안내견 산들이의 행복 ②

산들이가 이상을 느낀 건 어느 봄날이었다. “왜 이렇게 피곤하지?” 산들이는 비로소 깨달았다. ‘내가 나이를 먹었구나.’ 그리고 이별이 찾아왔다. 며칠째 풀이 죽은 채 엎드려 있는 산들이에게 한 남성이 다가왔다. “네가 산들이구나.” 고개를 들어보니 한 남녀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말했다. “산들아, 그동안 좋은 일 많이 했다며? 이젠 내가 너를 돌봐줄 테니, 산들이 하고 싶은대로 다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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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쁘다며 사람들이 몰려왔다. 늘 하던 대로 가만 있으려 했는데, ㄹ이 말했다. “산들아, 이젠 리액션 해도 돼. 넌 이제 안내견이 아니라 그냥 내 반려견이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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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내견 산들이의 행복 ①회 보기

산들이의 주인이 된 ㄷ은 헬스키퍼였다. 피로 회복을 원하는 회사가 있으면 달려가 안마해주는 직업을 일컫는다. 혼자가 아니라 여러 명이 같이 활동하고, 이들을 인도하는 자원봉사자도 있지만, ㄷ에게 산들이의 존재는 절대적이었다.

ㄷ이 안마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산들이는 흐뭇해했다. “우리 주인님은 남에게 좋은 일을 하는구나.” 집에 온 뒤 ㄷ은 가끔 산들이에게 안마를 해주기도 했다. “주인님, 저도 피로가 싹 풀려요. 고마워요.” ㄷ은 사회복지사 시험에 합격해 공무원이 된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어서, 집에 온 뒤에도 늦게까지 공부를 했다. 그런 ㄷ을 보면서 산들이는 ‘나도 열심히 할 거야!’라며 앞발을 불끈 쥐었다.

출퇴근 시간은 산들이에게 가장 즐거운 시간이었다. 자신의 존재감이 가장 잘 드러나는 때이니 말이다. 길을 걸을 때나 지하철을 타기 위해 계단을 오르내릴 때마다 산들이는 ㄷ에게 위협이 될 것이 있는지 살펴보느라 눈을 부라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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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렇게 피곤하지? 자도 잔 것 같지 않고 말이야.” 심지어 늦잠을 자서 ㄷ이 먼저 깨우는 일까지 생겼다. 산들이는 비로소 깨달았다. “아, 내가 나이를 먹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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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날 차가 인도로 뛰어드는 바람에 길 한가운데가 푹 꺼진 적이 있었다. ‘앗, 안돼! 위험해!’ 산들이가 걸음을 멈추자 ㄷ은 뭔가 잘못됐다는 걸 인식했고, 진로를 변경해 위기를 탈출했다. “산들아, 고마워.” 그 말에 산들이는 호탕하게 웃었다. “졸업 성적 1등인 저에게 이건 아무것도 아니라고요!”

아쉬운 점은 사람들이 안내견을 신기한 듯 바라본다는 것이다. 어쩌면 그렇게 귀엽냐고 쓰다듬으려 하는 이들도 한둘이 아니었다. 자기가 예뻐서 그런다는 건 알지만, 이런 일들은 산들이의 집중력을 흐트러뜨려 ㄷ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었다. 누군가는 먹을 것을 내밀기도 했는데, 그럴 때마다 산들이는 훈련소 시절 교관이 한 말을 떠올렸다. “산들아, 먹을 것에 혹하지 마라. 네가 식탐에 빠지면 본연의 임무를 못 하게 된단다.”

이런 것들이야 의도 자체는 나쁘지 않으니 넘어갈 수 있지만, 정말 화가 나는 것은 자신이 개라는 이유로 출입을 막는 일부 업소였다. 한 식당에서는 ‘손님들이 싫어한다’는 이유로 산들이를 막아섰고, 버스에 타려다 쫓겨난 적도 세 번이나 있었다. 같이 있던 ㄷ의 여친이 장애인복지법을 언급하며 부당하다고 항변했지만, 그들은 막무가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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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다섯 산들이는 네명의 주인과 함께 했다. 그 모두에게 사랑을 받았고 그만큼 돌려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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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깨가 축 늘어진 채 돌아서는 ㄷ의 모습을 보는 건 산들이에게 슬픈 일이었다. 성질 같아서는 확 물어버리고 싶었지만, 산들이는 조용히 눈을 부라리는 것으로 화풀이를 대신했다. 그래도 ㄷ과 지냈던 시간은 산들이에게 보람과 행복을 느끼게 해줬다. 비 오는 날 전철에 탔을 때 ㄷ은 산들이의 몸을 휴지로 닦아주며 미안해했고, ㄷ이 그토록 원하던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을 때 ㄷ은 산들이를 붙들고 눈물을 흘렸다. “산들아, 네 덕분이야. 정말 고마워.” ㄷ의 결혼식장에도 산들이는 가족의 한 사람으로 당당히 참석했다.

앞으로도 쭉 ㄷ과 함께하겠다고 생각했던 산들이가 이상을 느낀 건 어느 봄날이었다. “왜 이렇게 피곤하지? 자도 잔 것 같지 않고 말이야.” 심지어 늦잠을 자서 ㄷ이 먼저 깨우는 일까지 생겼다. 산들이는 비로소 깨달았다. “아, 내가 나이를 먹었구나.”

나이 든 산들이를 보면서 ㄷ은 자주 미안해했다. 그리고 이별이 찾아왔다. 산들이를 ㄷ에게 분양해줬던 이들이 다시 찾아왔을 때, ㄷ는 산들이를 껴안고 한없이 눈물을 흘렸다. 산들이의 눈에서도 눈물이 흘렀다. 헤어지는 게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르겠지만, 이별에는 내성이 생기지 않는 듯했다.

며칠째 풀이 죽은 채 엎드려 있는 산들이에게 한 남성이 다가왔다. “네가 산들이구나.” 고개를 들어보니 한 남녀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말했다. “산들아, 그동안 좋은 일 많이 했다며? 이젠 내가 너를 돌봐줄 테니, 산들이 하고 싶은대로 다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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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이제 내 반려견이니까”


새 주인이 된 ㄹ은 물심양면으로 산들이를 돌봤고, 하루도 빠지지 않고 산들이와 한 시간이 넘는 긴 산책을 했다. 그때마다 산들이가 예쁘다며 사람들이 몰려왔다. 늘 하던 대로 가만 있으려 했는데, ㄹ이 말했다. “산들아, 이젠 리액션 해도 돼. 넌 이제 안내견이 아니라 그냥 내 반려견이거든.” 오, 그래? 산들이는 8년간 참아왔던 필살기를 선보였다. 좋아 죽겠다는 표정으로 두 발로 서거나, 벌렁 드러누운 채 눈웃음을 치기도 했다. 사람들은 자지러졌고, ㄹ은 흐뭇한 표정으로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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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들아, 그동안 좋은 일 많이 했다며? 이젠 내가 너를 돌봐줄 테니, 산들이 하고 싶은대로 다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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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은 방송에 가끔 나가는 기생충학자가 ㄹ에게 놀러 왔다. 그는 ㄹ을 삼촌이라 불렀다. 그날은 그를 포함해 셋이서 산책을 나갔는데, ㄹ에 따르면 그는 제법 얼굴이 알려진, 준 셀럽이라고 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죄다 산들이에게 “예쁘다”며 찬사를 퍼부었고, 그 기생충학자를 알아본 이는 아무도 없었다. 스스로 ‘관종’이라 칭하는 그는 산책 후 이렇게 탄식했다. “이런 개만도 못한 인지도라니! 내가 인생을 헛살았구나!”

얼마 전에는 ㄹ 부부가 산들이를 앞에 놓고 케이크에 불을 붙였다. “산들아, 열 다섯 살 생일 축하해!” 그렇구나. 내가 벌써 그렇게 나이를 먹었구나. 요즘 다리가 쑤셔 잘 걷지도 못하고, 툭하면 병원 신세를 졌는데, 그게 다 나이 탓이었어. 우리 종의 수명이 12살 정도라니 나는 오래 산 편이네?

산들이는 케이크를 앞에 놓고 회상에 잠겼다. 지난 세월 동안 난 네 명의 주인과 함께 했어. 그리고 그 모두로부터 사랑받았어. 이별이 슬프지 않은 건 아니지만, 곧 더 큰 사랑에 의해 아픔이 씻겨졌으니 나 정도면 행복한 개였다. 내가 세상에 있을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아서 미리 인사를 드리자. “고마워요, 내 주인님들. 제게 큰 사랑을 주셨어요. 참, 삼성화재에게도 감사해요. 안내견을 듬뿍 지원해 주셔서요.”

단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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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들이와 ㄹ. “산들아, 이젠 리액션 해도 돼. 넌 이제 안내견이 아니라 그냥 내 반려견이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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