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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7 (일)

사토미씨는 딸에게 “‘독도는 한국 땅’ 야무지게 말하라”고 가르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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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이란주의 할 말 많은 눈동자

④일본 출신 이주여성 사토미

한국 생활 20여년, 사토미씨 사연

경계인으로 안절부절못하며 살아와

엄마 때문에 차별받지 않을까

아이가 클수록 두려움이 커져

‘독도는 한국 땅’ 말하라 가르쳐도

딸은 초등학교부터 ‘왕따’ 찍혀

다문화 강사 나가 차별발언 듣기도

이젠 단련돼 오히려 교육에 활용

출신 국가 아닌 개인을 보았으면


한겨레

일러스트레이션 순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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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출신 사토미(가명·45)씨는 한국인 남편, 딸 인화(가명·18)와 함께 한국에 살고 있다. 무거운 한일관계 때문에 늘 긴장하며 살아온 이 가족에게, 근래 이어지고 있는 일제 강제징용 관련 대법원 판결과 일본의 수출규제, 코로나19로 인한 두 나라의 입국제한 조치,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는 일본 교과서 사건 등은 말할 수 없이 괴로운 일이다. 이번 이야기엔 이 가족이 감당하고 있는 살얼음 같은 경계인의 삶을 조심스럽게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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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국적 유지한 사연


국적을 바꿨지만, 한국에서는 아무도 저를 한국 사람으로 보지 않아요. 일본에 가면 또 그러죠. 당신 국적 바꿨잖아. 애매하고 어디에도 속하지 못해요. 두 나라 사이의 경계선을 밟고 어정쩡하게 서 있는 느낌이죠. 하지만 두 나라 다 저한테 소중해서, 한국 뉴스에서 일본에 대해 나쁜 이야기 나오면 안절부절, 일본에 가서 한국에 대해 나쁜 이야기 나오면 또 안절부절, 그러고 살아요.

2019년에 한국 국적을 갖게 됐어요. 한국에 산 지 20년 만이죠. 국적이란 것이 개인에게 굉장히 중요한 정체성인지라 바꾸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더라고요. 흔히들 외국인에게 ‘한국인 되고 싶어서 한국에 왔냐, 한국 사람 다 됐다’ 하는 말을 하는데요, 그거 국적 바꿔본 사람이면 쉽게 하지 못할 말이에요. 귀화 과정에서 원국적을 ‘포기’해야 하는데, 나고 자란 나라를 ‘포기’한다는 것이 얼마나 아픈 일인지 겪어보니 알겠더라고요.

제가 일본 국적을 유지했던 가장 큰 이유는 친정어머니 때문이었어요. 어머니가 일본에 살아 계신데 어떻게 내가 국적을 바꾸나 싶었어요. 결혼해서 한국에 올 때도 어머니가 가장 걸렸어요. 어려서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랑 둘이 살았는데, 늙어가는 어머니를 두고 멀리 오려니 마음이 참 그렇더라고요. 그런데 국적을 바꾼 계기도 또 어머니 때문이에요. 지난 몇 년 어머니가 많이 편찮으셨는데, 제가 일본에 길게 있을 수 없으니 한국으로 모셔 와서 간병했거든요. 그 일을 겪으며 드는 생각이, 만약 어머니가 돌아가시면 내 여권 연장에 필요한 호적등본을 누가 떼서 보내줄까, 일본에는 친구도 다 끊어지고 부탁할 사람도 하나 없는데. 내가 죽으면 누가 일본 대사관에 가서 사망신고를 해줄까, 일본어를 못하는 인화가 거길 찾아가서 쩔쩔매며 내 사망신고를 할 걸 생각하니 아찔하고 마음이 급해졌어요.

제가 일본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사람들이 그래요, 딸도 일본어 잘하겠네요! 저는 애매하게 웃어 넘겨요. 사실 저는 인화에게 일본어를 못 가르쳤거든요. 시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 인화를 낳아 키웠는데, 시아버지가 일본어를 못 가르치게 하셨어요. 일본이 불편하고 싫으셨던 거 같아요. 결혼할 때는 모두 축복해 주셨지만, 막상 일본인 며느리와 사는 것이 쉽지는 않으셨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런 시아버지 마음을 알지만 친정어머니를 생각하면 속상해요. 하나밖에 없는 손녀가 얼마나 보고 싶고 궁금했겠어요. 지금처럼 영상통화를 할 수 있는 때도 아니고 전화로 목소리만 겨우 들을 수 있는데, 인화는 외할머니랑 아무 대화도 나누지 못했어요. 몰래 일본어를 가르칠까 싶었지만 만약 그랬다가 아이가 할아버지 앞에서 불쑥 일본어를 하면 얼마나 난감한 일이 벌어지겠어요. 그때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나요.

시아버지는 너무 어려워서 제 마음을 이야기할 수 없었지만, 시어머니하고는 한번 기회가 있었어요. 위안부 피해 할머니에 관한 뉴스를 보며 어머니가 “아이고, 아이고!” 하세요. 저는 마음이 한없이 오그라들었어요. 당장 어머니 앞에서 제가 죽을죄를 지은 듯 어쩔 줄 몰랐어요. 숨도 못 쉬다가 간신히 용기를 냈어요. “어머니, 한국하고 일본이 문제가 심각하네요.” “아유, 옛날에 일본 놈들이 말이다, 어찌나 악독하게….” “맞아요, 어머니. 빨리 해결되면 좋겠어요.” “그래도 너는 좋아. 너는 일본 사람이지만 그래도 좋아.” 고작 그런 대화를 했을 뿐이지만 그것만으로도 서로 마음이 좀 편해졌어요.

한일관계가 이 정도로 나쁘다는 것을 일본에 있을 때는 몰랐어요. 그저 막연하게 여러 갈등이 있다고만 알고 왔는데, 한국에서는 바로 피부로 와닿았어요. ‘다케시마’라는 말도 한국에서 처음 들었어요. 한국 와서 얼마 안 됐을 때 뉴스에 독도 문제로 삭발하는 장면이 나왔어요. 일본 사람 입장에서 보면 꽤나 과격한 모습이었어요. 놀라서 무슨 내용인지 알아보려고 도서관에 가서 책을 찾아봤어요. 일본 책은 전혀 없고 한국 책뿐인데 너무 어려워서 단어를 건너뛰고 또 건너뛰었어요. 대충 눈치만 채고 더 공부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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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네 엄마 나쁜 사람이야!”




아이가 커가면서 두려움이 점점 커졌어요. 제 출신 국가 때문에 아이한테 힘든 일이 생기지 않을까 걱정됐어요. 학년이 바뀔 때마다 선생님을 찾아가 부탁했어요. “제가 일본 출신이라는 점 때문에 아이가 나쁜 말을 듣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잘 살펴주시고 혹시 무슨 일 있으면 꼭 말씀해 주세요.” 아이에게는 초등학교 가기 전부터 독도가 어느 나라 땅이냐고 묻거든 망설이지 말고 ‘독도는 한국 땅’이라고 야무지게 말하라고 가르쳤어요. 혹시라도 머뭇대거나 모른다고 하면 바로 이상한 일이 생길 테니까요. 하지만 아무리 조심해도 벌어질 일은 다 벌어졌어요. 인화가 초등학교 1학년 때 일제시대 독립운동가를 가둔 서대문형무소로 현장학습을 갔어요. 거기서 어떤 학생이 인화에게 소리쳤대요. “너네 엄마 나쁜 사람이야!” 그 아이에게 주의를 주기는 했지만 인화가 많이 놀랐을 거라고, 선생님이 전해줬어요. 그게 시작이었어요. 인화는 그 일로 왕따가 되어 고등학생인 지금까지 왕따예요.

저는 이주민이라 학교 급식봉사, 청소봉사에 더 신경 써서 나갔는데, 그 때문에 인화 엄마가 일본인이라는 것을 엄마들이 다 알게 된 거죠. 그 뒤로 큰 뉴스가 터질 때마다 문제가 생겼어요. 가장 심했던 일은, 아이가 5학년 때 우리 집 현관문에다 누군가 ‘인화 엄마 일본인. 죽어라’라고 써놨던 일이죠. 이걸 남편이 처음 발견했어요. 아이한테 일어나는 일을 제가 다 대처하고 남편은 전해 듣기만 하다가 그때 처음 그걸 직접 본 거예요. 충격이 컸던가 봐요. 경찰에 신고했는데, 나와서 조사하더니 학교에도 연락했더라고요. 선생님이 “어머니, 놀라셨죠” 하고 전화했어요. 저는 사과받고 싶다고 했어요. 정말 사과받고 싶다고. 하지만 그 뒤로 학교와 경찰에서 아무 연락이 없었어요. 인화에게 혹시 학교에서 괴롭히는 아이가 있는지 물어봤지만, 얘는 원래 왕따여서 괴롭히는 애가 없대요. 그 일은 그렇게 끝났어요.

아이가 중학생일 때는, 한 선생님이 수업 시간에 일본 욕을 엄청 하다가 학생들 반응이 이상하니까, 혹시 일본인 부모님 둔 학생이 있냐고 물었대요. 인화가 손을 드니 아주 민망해하면서 미안하다고 하시더래요. 학생들에게 바른 역사를 가르치는 것은 꼭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너무 감정을 실어 말씀하시면 우리 입장에서는 참 힘들어요. 그런 일이 자주 있으니까 인화는 익숙해져서 별로 감각이 없어요. ‘아, 또 그런가’ 하는 마음이죠. 하지만 몸이 반응해요. 체하고 머리가 아프대요.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이가 다 말하지 않아도, 아프다거나 학교에 가고 싶지 않다고 할 때는 대개 그런 이유라는 것을 제가 알아요. 본인은 왜 아픈지 모르지만 스트레스 받으니까 아픈 거예요. 간절하게, 엄마로서 딸을 지켜주고 싶어요. 아니, 지켜준다기보다 옆에서 같이 고민하면서 아이 스스로 해결할 수 있게끔 힘을 키워주고 싶어요. 피할 수 없다면 부딪혀야 하니까요.

딸에게 이야기했어요. 역사는 역사야. 그 역사로 인해 상처받지 마라. 엄마는 일본이 한국에 과거사에 대해서 분명히 사죄해야 한다고 생각해. 하지만 그 일로 현재 너희들까지 사이가 나빠질 필요는 없어. 이것은 아이에게 하는 말인 동시에 저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기도 해요. 인화는 저랑 위로를 나누고 위안부 피해 할머니께 편지 쓰기 캠페인에 참여하며 자기 입장을 정리해 가고 있어요. 그러면서 아이가 자기를 지킬 힘을 얻기를 바랍니다.

저는 다문화 강사로 활동하고 있어요. 주로 초중생들을 만나 일본 사회와 문화에 대해 이야기해요. 한번은 초등학교 1학년 교실에 들어갔는데, 한 학생이 벌떡 일어나서 저에게 손가락질하며 “살인자! 일본 사람은 다 살인자야!” 하고 소리쳤어요. 그때는 하시마섬(군함도)에 관한 뉴스가 많이 나올 때였어요. 독도 이야기로는 ‘살인자’까지는 안 나와요. ‘와, 세다!’ 엄청 놀랐죠. 침착하기 힘들 정도였어요. 한 중학교 수업에서는 제가 교실에 들어가니 학생들이 약속한 듯 다 같이 ‘독도는 우리 땅’ 노래를 우렁차게 부르기도 했어요. 정말 울고 싶었어요. 저는 그 마음이 뭘까 생각해 봤어요. 여러 가지가 섞여 있겠지만 대개는 일본인인 저를 공격하고 싶은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비슷한 일을 반복해서 겪으면서 학생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조금씩 정리됐어요. 저는 마음을 진정시키고 학생들과 하나하나 눈을 맞추며 말합니다.

“과거에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배 하면서 마음 아픈 일이 많았어요.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지금은 서로 사이좋게 지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도 많아요. 저도 여러분과 사이좋게 지내고 싶어서 여러분을 만나러 온 거예요. 그런데 제가 일본 사람이라고 해서 놀리거나 무조건 비난하는 것은 옳지 않은 행동입니다. 일본 사람은 다 독도가 일본 땅이라고 주장할 거 같아요? 그렇지 않은 일본 사람도 많아요. 저도 그중 하나죠. 한국과 일본 사이에 갈등이 심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국가 간에 풀어야 할 문제입니다. 그럴수록 우리 개인들은 서로 만나고 이해하고 친해지려고 노력하면 좋겠어요. 여러분은 어떻게 한국인이 되었나요? 한국인 어머니 아버지에게서 태어났기 때문에 한국인이 된 거죠? 저도 일본인 부모님에게 태어났기 때문에 일본인이 된 거예요. 이처럼 출신 국가는 자기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출신국을 이유로 차별하고 놀려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은 앞으로 다양한 나라 사람을 만날 기회가 많을 거예요. 누구를 만나든, 그 출신국만 보고 섣불리 판단하지 말고 개인의 생각과 처한 상황을 잘 살펴보며 좋은 관계를 맺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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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의 변화에서 희망 찾아




수업이 끝나니 학생들 몇이 다가와서 아까 죄송했다고 합니다. 또 그중 한 아이는 작은 목소리로 자기 아빠가 일본 사람이라고 말했어요. 그동안 애써 감춰왔던 것을 말할 용기가 생겼나 봐요. 주변 친구들이 “와, 진짜?” 하면서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니, 그 아이가 밝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지금은 저와 딸에게 뭔가 일이 생겨도 놀라거나 당황하지 않아요. 오히려 “이거 엄청 좋은 차별사례다, 교육 때 써먹어야지! 너도 학교에서 무슨 일 있으면 꼭 알려줘.” 우리는 이렇게 부딪히며 조금씩 단단해지고 있어요.

사실 아이들이 살인자라 소리치고 ‘독도는 우리 땅’을 떼창하며 저를 밀어낼 때는 정말 암담했어요. 여기서 못 살겠다 싶었죠. 그런데 계속 교육활동 하면서 아이들이 변화하는 것을 느끼니까 재미있고 의미 있어요. 상처 깊은 한일관계가 이런 소소한 노력으로 달라지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저는 계속해 보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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